이영기'발해1300호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지금 우리 젊은이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세계를 향한 '도전정신'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그랬듯 진취적인 기상으로 세계 속에 뻗어나가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살길입니다."

최근 '발해1300호 기념사업회' 설립 추진위원장에 취임한 이영기 위원장(48-도서출판 명상 대표)은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젊은이들의 패배주의는 진취적인 기상을 갖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월 31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에서는 '제1회 발해1300호 추모대제'가 열렸다. 발해의 역사적 자취를 되찾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주도까지 20일 동안 항해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은 고(故) 장철수 탐사대장 등 4명을 명복을 기리기 위해 열린 추모식이었다. 이 행사는 대한남아의 기개를 통해 나약한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겠다는 이 위원장의 혼과 열이 담겨 있다.

"1997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발해1300호'는 비록 초라했지만 참으로 웅대한 염원을 담은 뗏목이었습니다. 1300년 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건국한 해동성국 발해를 재조명한다는 뜻에서 뗏목 이름도 '발해1300호'로 명명했지요. 그들의 염원은 발해의 해상활동을 실증적으로 복원함으로서 발해를 역사의 중심부로 당당하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진취적 기상을 되새기고 이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값진 희생에 대해 일부에서 잘못된 평가를 내놓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일각에서 그들에 대해  '소영웅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니, '무모한 사람들'이라는 혹평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흥분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독립운동가 못지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발해1301호'를 오는 2007년에 다시 띄울 생각이다. 그는 직접 '발해1301호'에 승선할 계획이며, 이를 위해 최근 체력단련에도 나섰다. 목숨을 건 항해에 자신이 앞장섬으로써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겪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해양전문가 등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사전 고증작업을 철저히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또 '발해1300호 기념사업회'도 법인화해 대원들의 유자녀들에 대한 장학사업과 그들의 정신을 계승할 계획이다. 단발적인 행사보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행사를 통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린다는 것이다.

그가 '발해1300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농심마니'(회장 박인식)란 모임 덕분이다. '농심마니'는 산삼을 캐는 심마니에 '심는다'는 뜻의 '농'자를 붙여 1987년에 만든 친목단체다. 이 모임엔 화가-문인-산악인-언론인 등 300여 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여기서 '발해1300호' 고(故) 이덕영 선장과 만났고 그 취지에 동감, '발해1300호' 프로젝트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이 위원장은 "지난 연말 개최한 농심마니 정기총회에서 '발해1300호' 대원에 대한 추모사업으로 기념사업회 설립과 함께 '발해1301호' 추진위원회를 구성, 오는 2007년 출항을 목표로 준비작업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와 기업의 예산지원은 당분간 받지 않을 생각이다. 순수한 민간사업으로 펼칠 계획이기 때문이다.

'발해1300호 기념사업회' 발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농심마니'에서 현재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는 인사는 산악인 권경업씨를 비롯해 강찬모 화백, 만화가 한희작, 김종철 전 연합뉴스 사장, 개그맨 전유성, 배병휴 경제풍월 대표, 마광수 교수 등 80여 명에 달한다.


'발해1300호' 출발에서 조난까지

1997년 12월 31일 오후 6시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내항으로 뗏목 한 척이 예인선에 이끌려 미끄러져 들어왔다. 길이 15m, 너비 5m, 전체 넓이 20평 규모. 뗏목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이 뗏목은 겉모양부터 별난 데다 앞 돛에 새겨진 도깨비를 닮은 문양까지 낯선 것이어서 유난히 러시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뗏목에는 장철수 탐사대장(38)과 이덕영(49-선장), 이용호(35-촬영), 임현규(27-통신) 대원 등 4명의 한국인이 몸을 실었다.

이들은 550마일을 항해, 부산을 경유해 제주 성산포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동쪽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신라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던 해동성국 발해의 역사적 체취를 따라 5,000리 뱃길 탐사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후예'란 자부심을 뼛속까지 새기며 추위를 무릅쓰고 시속 3∼7노트의 속도로 순항을 계속하던 '발해1300호'는 7일째인 이듬해 1월 6일 폭풍우로 통신이 두절되며 표류를 시작했다.

대원들은 돛을 바로세우기도 힘든 매서운 바닷바람과 통신두절 등 최악의 조건을 헤치고 초인적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대원들은 출발 후 두 차례의 폭풍을 만나고 바람마저 방향이 달라 어려움을 겪자 도착지를 울릉도로 바꿨고 다시 쓰시마(대마도)난류와 동안 한류가 만나는 강원 동해시 인근 해역을 지나면서 조류와 바람의 영향으로 목적지를 부산으로 다시 바꿔야 했다.

표류 11일 만인 1월 17일 포항 앞바다에 도착한 이들은 18일 새벽 2시 경북 후포 부근 해상에서 포항해경 경비정을 만났으나 구조를 거부한 채 부산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19일 강한 북서풍과 조류의 영향으로 항로가 일본으로 급격히 바뀌어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

장 대장은 두번째 표류 4일 만인 22일 오후 5시 한국해양대와 21세기바다연구소에 "뗏목은 현재 일본 영해 20여㎞까지 접근해 있으며 해류와 바람의 영향이 바뀌지 않으면 23일 중에 일본 영해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고 햄으로 타전해왔다. 결국 이들은 23일 낮 12시에 일본 영해에 진입했으나 23일 오후 5시 일본 오키(은기)제도 북서쪽 5마일 해상에서 폭풍과 강한 눈보라를 만나자 구조를 요청했다.

구조를 요청받은 한국해경은 23일 오후 6시 23분 일본해상보안청 8관구 해상보안본부에 탐사대 구조협조를 요청했다. 일본해상보안청은 오후 9시께 1,000t급 경비함 3척을 구조요청 해역으로 보냈으나 기상 악화로 접근하지 못했다. 이어 오후 9시 33분에는 일본항공자위대 구조헬기 4대가 출동했으나 심한 파도와 풍랑으로 구조에 실패했다. 악천후 속에 닻줄에 의지하던 탐험대는 구조를 기다리지 못한 채 24일 오전 6시께 닻줄이 끊어져 뗏목이 뒤집히는 비운을 맞았다.

(뉴스메이커 2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