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절반 잘리는 비극 막아야죠”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학술연구기관인 ‘고구려사 연구재단’이 3월1일 공식출범한다. 이에 앞서 안병영 교육부총리, 장을병 정신문화연구원장,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 등 관계·학계·시민단체 출신의 50여명은 지난 4일 설립추진 총회를 갖고 김정배 고려대 교수(64·한국사학과)를 추진위원장에 임명했다. 5일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 왜곡이 아니라 나라의 절반이 잘리는 비극적 사태”라며 “북한 및 해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협력해 학문적으로 적극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한국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김교수는 한국고대사 연구자 중 몇 되지 않은 원로학자로 고려대 총장직을 맡아 행정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어떻게 보십니까.

“문서상으로만 볼 때는 현재 중국 영토내의 모든 것을 자국의 역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연고권을 가진 고대의 강역을 모두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는 것입니다. 동북공정은 고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55개 소수민족의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숨어있습니 다. 중국이 동북문제를 정책적 사안으로 삼는 것은 일견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 왜곡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절반이 갈라지는 비극적인 사태예요. 그나마 이번 사태에 대해 여야, 진보·보수 할 것 없이 전국민이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줘 다행입니다.”

-아직 공식 출범 절차를 남겨두고 있으나 재단의 성격을 놓고 말이 많습니다.

“현재로선 재단의 성격에 대해 말하긴 일러요.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어 더욱 그렇지요. 재단 정관에 어떻게 명시할 것인가는 12일 열리는 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할 것입니다. 명칭, 사업 등이 확정되면 구체적 성격이 드러날 겁니다.”

-처음에 정신문화연구원 산하 정부 출연기관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에는 민간 독립기구로 하자는 의견도 시민단체 등에서 나오고 있는데요.

“정부에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다가 최근들어 정부의 산하기관, 직속기관으로 하는 것은 배제하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게 옳다는 쪽으로 정리가 됐어요. 나도 그게 옳다고 봅니다. 공청회에서 기구의 규모 등도 논의되겠지만 방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재단이 움직이길 바랍니다. 행정력보다는 연구인력 양성이 중요합니다.”

-재단이 다루는 영역을 두고도 의견이 갈립니다. 고구려사입니까, 고대사 전반입니까. 아니면 동북아시아를 망라하는 것인가요.

“고구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명칭이 ‘고구려사 연구재단’이지만 고려, 발해, 코리아(한국) 등 모두가 고구려와 관련이 있습니다. 고구려와 연관된 부여, 고조선, 발해 등 모든 영역이 포함됩니다. 폐쇄적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한·중·일 역사, 고대~현대까지를 포괄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한 곳에서 통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단에 시민단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의견은 경청할 겁니다. 그러나 연구는 학자들의 몫입니다. 시민단체가 연구에까지 개입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분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국내 학계가 본격 대응에 나선지 3~4개월이 지났습니다. 학계의 대응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학계가 사태를 알리고 국민들을 계몽하는 과정은 대체적으로 훌륭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일각에서 일고 있는 복고적인 측면이나 대중에 영합하는 측면은 자제돼야 할 것입니다. 학문적 연구 결과로 대응하고 운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할 우려가 있어요. 다행스러운 일은 외국의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가 어떻게 중국역사냐’며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에요. 앞으로 해외학자들과 협력해 학문적 차원에서 중국을 비판하고 공격할 것입니다.”

-동북공정에 대한 학계의 견해에도 편차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수주의적 견해가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민족사를 고집한다는 국사 해체론자에 이르기까지….

“중·고등학교 역사과목을 선택 과목으로 하는 등 정부의 역사에 대한 홀대에도 책임이 있어요. 국제화 시대에는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것을 상대방에게 전수해줄 의무가 있는 법입니다. 국제화를 들먹이면 자국의 역사를 소홀히 하는 나라는 비극적인 사태를 맞게 됩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대책위원의 구성을 보면 서울대·고려대 등 특정대 인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대책위 활동이 특정 학맥으로 얽혀 있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그만큼 고대사 연구인력이 열악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고대사 연구인력이 서울대·고려대 등 극히 일부 대학에서만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에요. 연구 인력풀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고 고구려사 연구재단이 학맥 등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재단을 맡게 되더라고 운영은 투명·공정하게 할겁니다.”

-향후 동북공정은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보십니까.

“우리가 올바르게 대응하면 역사 왜곡은 바로 잡아지리라 봐요. 우리보다 다급한 쪽이 북쪽 학계인 만큼 북한과의 협력이 필요하지요. 재단이 정식 출범하면 학술대회 등 구체적인 협력사업을 생각하겠습니다.”

-국민들에게 하실 말씀은.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떨어졌어요. 정부는 주권국가로서 항의할 것은 항의하는 등 자신감 있게 나서야 합니다. 학자들은 연구성과에 따라 소신을 밝혀야 하고…. 국민들은 감정적·감상적으로 나가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경향신문 20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