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고구려史' 남북 공조 급하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인 최광식 교수는 지난해 10월 초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고구려 관련 자료들을 인천공항에서 모두 압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마침 지난달 정부 당국의 도움으로 이를 환수할 수 있다는 언질은 들었지만 웬일인지 아직까지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 남북 장관급 회담이 서울에서 열리고 있고,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남북 간의 협력을 논의한다지만 자료 하나 제대로 챙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은 2002년 2월부터 '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하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고구려사에 대한 연고권을 내세우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은 중국사, 이후는 한국사로 인정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고구려사는 모두 중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광활한 고구려의 옛터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 단순한 역사 왜곡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지닌다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우선 중국이 내세우고 있는 '동북공정'은 단순히 자국의 영토인 동북지역에 대한 역사연구나 정비사업이 아니다. 중국은 '한반도정세 변화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 중국은 북한과의 국경지역에 공안을 대신해 15만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향후 북한 붕괴시 대규모의 탈북자와 북한의 핵심 공산당원들이 동북 3성 지역의 조선족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기상황을 관리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혹시 발생할 수 있는 국경지역의 불안을 사전에 대비하고 차단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동북공정'은 중국의 대북한 지역에 대한 연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미국은 북한에 핵이 없다면 친중(親中) 정권이 들어서는 것도 양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장쩌민(江澤民)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총리는 미국 방문을 통해 반테러 캠페인을 계기로 이어지고 있는 중.미 간의 밀월기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반면에 미국은 대만의 독립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양해가 이뤄졌다는 관측이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고집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정권 교체'가 이뤄져야 하고, 이 시점에 북한을 통제하기 위한 대비를 위해서라도 중국은 북한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이 필요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남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중국과 미국이 상호 현안을 바탕으로 물밑 접촉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협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가 당사자들의 어깨 너머로 강대국들의 이해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이 벌어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 먼저 유네스코에 등재하고자 신청한 고구려 유물에 대한 판정이 보류됐다. 이에 중국도 고구려의 유물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고자 신청함으로써 올해 6월 중국의 쑤저우(蘇州)에서 이에 대한 결정이 내려질 예정이다. 현재 중국과 북한의 유물이 모두 등재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의 유물이 등재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피해야 하지만, 중국과 북한의 유물이 동시에 유네스코에 등재된다면 중국의 고구려사 연고권에 대한 공인이 이뤄지는 것이므로 향후 이 문제에 대한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럴 때일수록 남북한 간의 긴밀한 협조가 이뤄져 북한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유물에 대한 공동 연구가 시행돼 중국의 공세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역사 왜곡이 일본과의 문제로만 생각해 왔으나 이번 중국의 '동북공정'은 우리의 고대사를 전면 부인함으로써 오히려 더 위협적일 수 있다. 중국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2,000년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역사 문제에 대한 남북한 협력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에서의 민족 공조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남북 장관급 회담을 통해 고구려사 공동 연구에 합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안인해 베이징대 객원교수.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중앙일보 20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