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반쪽 서러워 그리 찡한가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의도를 보이면서 이 문제가 한ㆍ중 사이에 심각한 문제로 번지고 있다. 그런데 중국과의 ‘역사’ 문제는 단지 고구려사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영토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의 영토 국경 분쟁이 독도에 대해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단지 그동안 우리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해 낯설게 느껴질 뿐, 바로 압록강 북쪽 만주지방과 백두산을 둘러싼 중국과의 영토 분쟁이 그것이다.

중국측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이 1416년 조선 태종 16년부터 1446년 세종 28년까지 압록강 이북에 4군을 설치했으나 1459년 세조 4년에 포기함으로써 결국 그 땅은 여진족의 땅이 됐다(한국 역사서에는 모두 4군을 압록강 이남 지역에 설치한 것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청나라는 건국 이후 자신들의 본거지인 만주지역을 신성한 땅으로 만들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을 비워두는 철저한 봉쇄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후 조선에서 적지 않은 농민들이 광활하고 비옥한 만주지방으로 건너가 토지를 개간하면서 그 수는 갈수록 많아졌다. 그리하여 조선의 함경도 지방 관청에서 세금을 받을 정도가 됐다.

숙종 때 세운 백두산 정계비 소실

이렇듯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및 통치권 관할 문제가 대두되자 조선 숙종 38년인 1711년과 이듬해인 1712년에 청나라는 목극등(穆克登)을 특사로 파견해 조선과 국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목극등은 조선 관리와 함께 두 차례에 걸쳐 국경선에 대한 실지조사를 마치고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웠다(이 정계비는 이후 소실돼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이 정계비를 없앤 것으로 믿고 있으며, 중국측은 조선인들이 없앴다고 주장한다). 목극등은 청나라로 돌아가 강희제에게 모든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지금 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중국측은 “당시 목극등의 이 행적 때문에 백두산의 반을 조선에게 넘겨주고 말았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행동을 폄하했다.

청나라가 만주지역에 대한 봉쇄정책을 해제한 1871년 이후 조선인들의 만주지방 이주와 정착은 더욱 빠르게 늘어갔다. 당시 청나라가 관리를 파견해 토문강(土門江 또는 圖們江) 일대를 답사한 결과 이미 수천 명에 이르는 조선 사람들이 2만 묘가 넘는 토지를 개간하고 있었으며, 함경도 지방 관리들이 토지증서를 발급하고 호적을 정리하는 등 조선인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 사이의 외교 분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 정부는 토문강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목극등과 맺은 국경 협약에 근거해 토문강이 현재 지린성 옌볜에 있는 해란강이며, 따라서 해란강 남쪽 땅은 조선 영토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렇게 국경선 문제가 혼미해지자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중국인들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과 분쟁이 계속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에 놓였다. 이에 양국은 국경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해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공동으로 국경 실지조사를 벌였다.

1차 실지조사에서는 중국측이 토문강과 두만강은 같은 강으로 두 이름으로 불린다고 주장한 반면, 조선측은 토문강과 두만강은 서로 다른 강으로 만주 지방에 있는 토문강(해란강)을 국경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논란은 토문강의 발원지가 과연 어느 지점인가라는 문제였다. 조선측은 목극등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지점인 홍토산수(紅土山水)를 국경선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중국측은 토문강의 발원지가 홍토산수 남쪽에 있는 홍단수(紅丹水)라고 주장했다. 홍토산수에서 홍단수까지의 거리는 약 100리다. 이어 2차 실지조사에서는 조선측이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는 주장을 인정함으로써 한발 물러섰지만, 토문강의 발원지에 대해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청나라가 홍단수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석을수(石乙水)를 국경선으로 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대한제국 간도 관리사 통치권 행사

이런 상황에서 1894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청나라와의 조공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조선 정부는 본격적으로 국경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에 대해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열강들이 반발했고, 이들이 중국문제에 간섭하면서 러시아가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하게 됐다. 이때 러시아 주한공사 웨베르는 대한제국의 외무대신 이도재와 5개항에 합의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러시아가 조선에 옌볜지방 반에 대한 통치권을 할양하여 조선 정부와 함께 옌볜을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한제국은 다시 토문강이 해란강이며 토문강의 발원지는 홍토산수라는 이전의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나아가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임명, 5000~6000명의 병력을 간도 지역에 파견해 백두산 부근 남북 100리, 동서 200리의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자 조선은 청나라와 ‘국경문제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 내용은 ‘양국이 관리를 파견해 국경 실지조사를 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상황을 인정해 서로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현상유지 기조였다. 그런데 이는 양국이 합의했던 1887년 제2차 국경 실지조사의 결과를 양국 스스로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협약으로 양국의 국경문제는 다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조선과 중국 사이에 전개되었던 국경문제에 대한 논란을 제3자인 일본이 완전히 흩뜨려놓았다. 일본은 1909년 중국과 ‘간도조약’을 맺어 중국 주장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나라다.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일본 영사관 설치를 비롯해 룽징(龍井)과 옌지(延吉·국자가)의 개방 등 일본의 만주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일본은 간도조약으로 한국의 영토를 넘겨주는 대신 자국의 이권을 철저히 챙긴 것이다. 그리고 이 간도조약은 당시 조선 내각총리였던 이완용이 비준했다.

어쨌든 현재 중국측은 이 조약으로 양국 사이의 영토 분쟁이 완전히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이로조약과 포츠담선언, 그리고 중ㆍ일 평화조약에 일본이 이전에 폭력적으로 체결한 모든 조약은 무효화한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당연히 이 조약도 원인무효가 된다.

백두산 지역을 둘러싼 이 국경문제는 결국 6·25 전쟁 이후 북한이 중국과 한 비공개회담에서 중국측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해 홍단수를 토문강의 발원지로 인정하는 등 백두산 천지의 46%를 중국 영토로 인정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국경이 지금의 모습으로 확정돼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