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만 200여 山城 ‘천혜 요새’ 구축

=[韓國史속의 만주](5) 城의 나라 고구려=

“오골성은 평양성 서북쪽 700리에 있다. 동서로 산줄기 2개가 뻗어 있는데, 천길 낭떠러지로 푸르디 푸른 암석이다.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형문(荊門)의 삼협(三峽)을 마주하는 것 같다. 절벽 위에 초목은 없고 청송(靑松)만 외로이 구름을 벗삼고 있다. 고구려인들이 남북의 좁은 입구를 막아 성곽으로 삼았으니 가장 중요한 요새로구나.” 642년 고구려를 방문했던 당나라 진대덕의 귀국보고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대덕을 감탄시키고 놀라게 했던 오골성은 지금도 중국 랴오닝성 펑청현(鳳城縣)에 우뚝 솟아 있다. 봉황산성, 둘레만 16㎞, 사방이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안에는 소도시가 자리잡을 만한 대지가 펼쳐져 있다. 한복판에 서면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니 진대덕도 놀란 가슴을 안고 귀국했을 터이다.

◇ 성으로 뒤덮인 국토 = 그 옛날 고구려 땅이었던 만주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오골성과 같은 장대한 고구려 성을 만나게 된다. 만주에만 200여개가 남아 있다. 고구려 성은 북한에도 많이 남아 있고, 남한에서도 속속 발견되고 있다. 한탄강가에는 절벽을 따라 성곽이 늘어서 있고, 아차산에는 산마루를 따라 보루가 촘촘이 서 있다. 최근에는 금강변에서도 상당히 큰 고구려 산성이 발견되었다.

고구려인이 닿은 곳이라면 어디나 성이 버티고 서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라는 국호가 ‘성(城)’에서 유래했다. BC 2세기쯤 고구려인들은 ‘구려(句麗)’로 불렸는데, 성이나 고을을 뜻하는 ‘구루(溝婁)’ ‘홀(忽)’을 한자로 옮긴 말이다. 여기에 ‘고(高)’가 첨가되어 고구려라는 국호가 생겨났던 것이다.

또한 광개토왕릉비에는 ‘추모왕이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고 건국 과정을 묘사했다. 홀본 서쪽의 산성은 고구려 건국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이처럼 고구려는 축성으로부터 잉태되었고, 발길닿는 곳마다 성을 쌓은 그야말로 ‘성의 나라’였다.

◇ 고구려 성의 특징 = 고구려 성은 겉모양부터 중국 성곽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황허 유역의 평지에 황토를 층층이 다져 성곽을 축조했다. 이에 따라 평지에 쌓은 네모꼴 토성이 중국 성곽의 기본형이 되었다. 고구려보다 늦게 만주를 호령했던 거란족의 요나 여진족의 금도 이를 받아들여 평지 토성을 축조했다.

반면,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산간지대에서 발흥했다. 고구려인들은 평상시에 들판에서 농사짓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험준한 산으로 대피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을 쌓았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돌무지무덤을 조영하며 터득한 돌 다루는 솜씨를 활용했다. 산에다 쌓은 석성은 고구려 고유 브랜드인 셈이다. 퇴물림쌓기, 수평쌓기, 그렝이공법(바위 등 자연을 그대로 살린 축성법) 등의 축성술은 고구려 석공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산성을 쌓는 전통은 만주나 한반도 각지로 진출한 다음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해 지금 만주를 가 보더라도 고구려 성은 대평원이 아니라 대평원 바로 안쪽의 산간지대에 위치했음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외적을 방어해야 했던 고구려인들은 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산성에 석성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가령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도성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모두 쌓았다. 평지성에서 생활하다가 비상시에 산성으로 대피한 것이다. 또한 평원지대로 진출하면서 구하기 쉬운 흙으로 토성을 많이 쌓았다. 물론 평지성이나 토성을 축조할 때는 중국의 축성술을 도입해 활용했다. 고구려인들은 전통과 신기술을 접목시켜 성의 나라를 건설했던 것이다.

◇ 시대에 따라 달라진 산성의 입지조건 = 산성의 기능은 입지조건에 따라 다르다. 산봉우리에 위치한 산정식 산성은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물자보급에는 불리하다. 반면 넓은 골짜기를 감싼 포곡식 산성은 상대적으로 외부와 왕래하기 쉽다. 이에 고구려인들은 용도와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산성을 쌓았다. 건국할 무렵, 고구려인들은 압록강변 마울에 살다가 외적이 침공하면 험준한 곳으로 피난해야 했다. 그래서 이때에는 주로 산 정상에 성을 쌓았다. 압록강 중류일대에 오녀산성과 같은 산정식 산성이 많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각지로 진출해 지방제도를 갖추면서 산성의 쓰임새도 바뀌었다. 방어뿐 아니라 각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중심지 기능도 수행해야 했다. 이에 고구려인들은 군사방어와 지역거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지형, 곧 평지에 인접해 있으면서 넓은 골짜기를 감싼 산에 성을 축조했다. 안시성, 건안성, 신성 등은 모두 이러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 지역과 쉽게 왕래할 수 있고 내부에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천혜의 요새가 따로없다.

◇ 성(城)으로 구축한 방어체계와 지배체제 = 이처럼 고구려 성은 군사방어성인 동시에 지방지배의 거점 곧 국가체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고구려를 ‘성의 나라’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성주는 장군인 동시에 지방관이었다. 또한 성안에는 군사시설과 더불어 지방지배를 위한 관아나 창고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성들은 전략적 중요도와 관할 범위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전략적 중요도가 높고 넓은 지역을 관할하면 최고위 지방관인 욕살이 다스리는 대성, 그 다음은 처려근지가 다스리는 성, 말단은 누초가 다스리는 소성 등등. 고구려는 성을 근간으로 삼아 질서정연한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한 것이다.

방어체계도 성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구축했다. 도성의 경우,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하는 평지성·산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국내성과 환도산성’,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거쳐 평지성·산성을 합친 장안성(현재의 평양시가지)으로 이어졌다.

국경에서 도성에 이르는 구간의 경우, 초기에는 국내성 주변에 동심원 모양의 외곽방어선을 구축하고 그 바깥에는 하천 연안로를 따라 종심방어선을 구축했다. 평양천도 이후에는 랴오허~평양성 구간에 방어선을 겹겹이 구축했다. 특히 서북방 국경선에는 대평원에서 각 지류로 진입하는 길목마다 성을 축조해 남북으로 기다랗게 전연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처럼 물샐틈없는 방어망을 구축했으니, 당나라 관리조차 “고구려는 산에 의지해 성을 잘 쌓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당의 국내외 정보를 총괄하던 직방낭중 진대덕도 외교사절을 가장해 고구려 군사기밀을 정탐하다가 오골성의 위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대덕의 보고를 기초로 고구려 정벌계획을 수립했던 당 태종도 안시성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이처럼 성은 고구려 국가체제의 근간이자 생존의 필수시설이었다. 이에 고구려인들은 멸망하는 그날까지 온 국력을 기울여 성을 쌓고 또 쌓았다. 성돌 하나 하나에 생존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담고서. 이러한 고구려 축성술은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선조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군사시설이자, 선조의 지혜를 담은 문화유산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말이다. (여호규/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