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술암흑기온다] 서울공대·자연대의 몰락

공대 수석 입학하고도 법대·의대 재입학

이른바 ‘명문’을 자임하는 서울의 한 사립대 정문에서 학생회관까지 이르는 300여m 도로변. 플래카드 30여개가 줄지어 내걸려 있다. ‘제45회 사법시험 합격, 인생 대역전! 노○○ 높이 난다’ ‘판관 정○○ 납시오―제45회 사법고시 합격’ ‘권○○ 선수 사법연수원으로 이적!!! 축하합니다’ ‘신문편집부 김○○, KBS PD 등극’….

미래 엘리트의 산실 대학교 캠퍼스. 그곳에 내걸린 플래카드에서 읽을 수 있는 한국의 미래는 암담하다. ‘인생역전’의 한탕주의, 20대 청년들 머리에 침투한 뿌리깊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의식. 어느 한 플래카드에서도 원리를 탐구하는 자에 대한 축복, 기술을 창조하는 자에 대한 찬양은 없다.

어디 이 대학 하나만의 풍경이겠는가. 수많은 한국 대학들은 지금 예외없이 고시와 의대 재입학을 준비하는 학원으로 바뀌고 있다. 대학가에 고시 열풍과 의대 진학붐이 인 것은 오래전 이야기지만, 내년부터 의대 출신이 아니라도 시험을 거쳐 의·치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열풍(熱風)은 광풍(狂風)으로 변하는 중이다. 박사 학위를 목전에 둔 최정예 과학기술 인력들까지 너도나도 고시와 의사의 길을 좇아 엔지니어의 길에서 이탈하고 있다.

신입생 실력 저하…'수학 성취도 시험' 낙제생 점점 늘어나

요즘 대학가 플래카드 '祝고시합격'뿐…이공계 관련은 없어

지난해 2학기 서울대학교 자연대 개설 과목인 생물학과 유기화학 강좌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초만원으로 진행됐다. 수강생 절반 가량이 관련 전공학과 학생이 아닌 타과 또는 다른 단과대 학생이었다. 두 과목은 의·치의학전문대학원에서 사전 수강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달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받는 이모(28)씨도 두 과목을 수강했다. 이씨는 “곧 결혼할 예정인데 예비 처가 쪽에서 ‘공학 석사로는 세상 살기 어려우니 치대 시험을 준비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2004학년도 수능 자연계 최고 득점자(393점) 채모씨. 서울공대 전기컴퓨터공학부 졸업을 목전에 둔 4학년 휴학생이다. 지난 97학년도 입시에서 충북 지역 수석을 차지하며 이 학부에 입학한 그가 이번에 원서를 넣은 곳은 서울대 의예과다.

과학기술 인력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회·경제적 풍토는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짊어질 정예 훈련병들의 자질을 급속히 떨어뜨리고 있다.

2004학년도 대성학원 자연계 정시모집 배치 기준표. 서울대 자연대 물리학부와 공대 기계항공공학부는 수능 349점 이상이 지원할 수 있는 것으로 안내돼 있다. 그 위 칸인 수능 356점 이상 그룹에 속해 있는 ‘중상위권 대학들 약학과’보다 커트라인 기준이 낮다. 서울대가 지난달 공대·자연대 수시모집 합격자 3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학성취도 측정시험에서는 4명 중 1명꼴인 24%(79명)가 낙제였다.

자질이 떨어지는 훈련병들이 고강도 훈련을 소화해낼 수는 없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김찬중 교수는 작년 1학기 대학원 석사과정 70여명을 상대로 ‘기계공학 고급해석’ 강좌를 맡았지만 교재는 학부 2학년생용 ‘길잡이 공업수학’을 사용했다. 학생들이 고등학교 수준의 미분방정식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린 결정이다.

서울대는 2001년 이공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수학 시험을 실시한 뒤 성적에 따라 수강과목을 제한했다. 정상적으로 수업을 소화할 수 없는 학생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3년이 흐른 지금, 서울대 물리학과는 석사과정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올봄 학기가 시작되기 전 2주간 기초 역학·양자역학·열물리학 등에 대한 ‘특별 과외’를 실시할 계획이다. 과외를 하지 않으면 석사과정 수업을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라고 자체 분석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전사 후보생들의 자질 저하는 학부 과정에서 교육을 통해 치유되지 못하고, 3년의 시차를 두고 석사 입학생들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이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기술 전쟁의 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할 5~6년 뒤. 기업과 연구소들은 또다시 이들에 대한 ‘평가시험’과 ‘보충교육’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정예병들을 양성해내지 못하는 한국. 이대로라면 격전의 기술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2004-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