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와 주변국

며칠전 미국의 한국 전문가 몇 사람과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자연히 한·미관계가 화제로 등장했는데,이번 외교부장관의 경질이 한국의 대미정책에 어떤 변화를 가져 올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명색이 동북아정치를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어정쩡한 답변을 하고 말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현정부의 대미정책이 어떤 것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정이 되고 그리고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전에는 대미정책의 주무부서인 외교부 미주국의 견해와 다른 정부기관의 그것 간에는 별로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정권이 들어서서는 이번 장관 경질 과정을 통해 나타났듯이 외교부의 대미인식과 다른 정부기관, 특히 청와대 쪽이나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생각 간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외교부 고위급 실무자들의 생각이 대체로 전통적 동맹관계의 틀속에서 미국에 협력하는 것이 우리의 국가이익에 부합된다는 것인 반면에 대통령 측근의 참모들은 이러한 자세가 자주성을 결여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동맹이 이루어진 지 50여년, 동맹을 가능케 했던 국제환경이 실로 많이 변했다. 한·미 두 나라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던 소련이 와해된 지도 벌써 십여년이 지났고, 중국도 이제는 과거의 공산국가가 아니고, 아시아 국가 중에서 미국과 한국이 경제적으로 가장 많이 교류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두 나라가 처한 여건들이 변하면서 미국의 이해관계와 우리의 이해관계도 변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과거식의 동맹관계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 측에서도 잘 인식하고 있는 사항이다. 실제로 동서냉전 체제가 종식된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안보적 관심은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있으며 특히 9·11 테러사건 이후로는 대외정책이 테러공격을 막는데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서 과거식의 동맹관계의 유지는 우리 보다는 미국쪽에서 오히려 더 부담을 느낄지 모른다. 최근들어 미국쪽에서 부쩍 열을 내고 있는 주한미군의 재배치나 심지어 부분적 철수의 시사는 바로 이를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문제는 이러한 시점에서 혹시 야당이나 시민단체라면 몰라도 국정을 이끌고 있는 핵심부서에서 한·미관계와 관련하여 굳이 자주성을 공개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발언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려를 하게 만든다.

첫째는 국제관계에 대한 기본 인식의 문제이다. 즉, 오늘의 국제관계를 제국주의가 판치던 19세기나 20세기 초의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강자가 자기 구미대로 상황을 이끌려고 하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 마음대로 하기에는 너무도 제약요인이 많다. 이라크에의 군사적 개입 등으로 미국의 일방주의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어느 나라도 자기 의사대로만 행동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따라서 자주란 개략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지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은 아닌 것이다.

둘째로 전략적 사고의 결여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는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이해타산으로 하는 것이다. 영국과 일본이 우리보다 덜 자주적이라서 미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한국은 아직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정도보다 정치,경제,안보 등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미국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자주를 떠듦으로써 손해를 보고, 그 결과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자주가 손상이 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될 것이다.

최근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포함하려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한·일간에 갈등이 있을 경우 미국이 많이 중재를 했고 그 중재는 대체로 한국을 돕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보다는 일본이 더 미국에게 착실한 동맹자가 되고 있는 판이다. 한·미관계에 틈새가 벌어지면서 주변국가들이 한국을 가볍게 보고 본격적으로 간섭해 올 것이라는 생각은 과연 기우에 불과할까?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 유세희(한양대 교수)

(국민일보 2004-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