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에서 이기려면

프랑스 지성 어네스트 레넌이 지적하였듯이 "역사 왜곡은 근대국가가 되는 필수적 요소"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근대국가들이 국가 형성초기 단계에서 역사 왜곡을 통해 국민통합을 꾀하였다.

북한이 정권 출범 초기에 고대사, 특히 고구려사를 강조하였던 것도 북한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일종의 역사 왜곡이었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고구려사 중국화 기도 또한 중국이 현 중국 영토 내의 수십 만에 달하는 소수민족을 통합하여 안정된 통일 다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역사 왜곡이다.

역사 왜곡은 미래의 침략을 위한 구실을 제공하기도 하고 이미 시작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동원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만큼 생생히 경험한 민족도 많지 않다.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냈고,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자국 주장에 합치하는 일부자료를 들어 자국민을 설득하고 국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최근의 역사 왜곡에 대해 우리 국민은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에 대한 증오나 비난이 역사침략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는 아니다. 주변국가와의 역사전쟁에서 이기려면 우선 전쟁의 원인, 특히 내인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인은 외인에 비해 치유가 쉽기 때문이다.

주변 국가에 의해 우리 역사가 훼손당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소치이다. 역사는 입시의 한 과목으로 암기의 대상일 뿐 그것이 우리의 국가이미지 생성의 핵심 요소라거나 국력의 한척도가 된다는 인식을 우리는 그 동안 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역사 왜곡에 대처하는 출발점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귀히 여기지 않은 결과 한국사를 전공하는 외국인 학자의 규모나 외국어로 된 한국사 교재의 숫자에 있어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턱없이 열세인 것이 우리 역사를 주변 국가들이 침범가능한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일본에 의한 수차례의 역사 왜곡을 경험하면서도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경시 현상을 키워온 우리의 학술정책도 문제다. 70년대 중반과 80년대 초반 이미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을 경험하였고, 일본 정치인들에 의한 한국사 모독 발언은 지속적이었으나 우리의 대처는 간헐적이고 단편적이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의 역사 왜곡에 대한 무관심을 일깨우는 데 가장 큰공헌을 한 것은 우리 정부도, 학자도, 정치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부끄럽게도 일본이고 중국이었다. 역사도 영토와 마찬가지로 지킬 능력이 없으면 침략과 훼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뼈아픈 경험조차도 너무나 쉽게 잊기를 반복해 왔다.

역사 전쟁에서 이기려면 역사 전쟁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외국에 의한 우리 역사 침범이나 훼손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있다. 일본의 침략합리화 사관이나 중국의 고구려사 찬탈 시도는 알면서 저지르는 의도적이고 악질적인 왜곡이다. 반면 상당히 많은 외국의 역사교과서 문제점은 정보 부족에서 오는 단순 오류이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외국의 교과서에는 남과 북의 역사 용어 불일치가 야기하는 혼란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빈번하게 보이는 역사 전쟁의 형태는 왜곡도 오류도 혼란도 아니다. 무관심이다. 너무나도 많은 외국 교과서 속에 우리의 역사나 문화는 없다.

이렇듯 다양한 역사 전쟁의 형태에 따라 적합한 대응이 요구된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우리 역사학 수준의 향상이 우리 역사의 국경선을 지키는 외길이다.

닫힌 한국사가 아니고 열린 한국사여야 하며, 우리끼리만 통하는 한국사가 아닌 세계인과 대화가 가능한 한국사가 되어야 한다.

역사에 있어서 국경선은 역사학의 수준이 좌우하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다양한 외국어로 된 한국사 교재의 개발과 해외 보급을 서둘러야한다. 남북간의 역사 분야 용어 통일도 서둘러야 할 과제이다. <이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매일경제신문 2004-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