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지배계층은 고구려인"

발해(698∼926년) 전기 문자서체가 고구려(BC 37~AD 668) '광개토태왕 비' 예서체와 '고분벽화명문' 북조체와 같은 필법을 구사했다는 증거가 제시돼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

손환일 정신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27일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제31차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 정기 학술발표회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발해 기와에 나타난 명문과 서체'를 발표했다.

이는 발해와 고려를 제외한 통일신라만이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중국 사회과학원측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

손 연구원은 "문자는 곧 지배층 문화기 때문에 발해 건국 초기 지배층 서사문화는 건국 주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며 "발해 전기 기와 문체가 고구려 필획이나 결구와 같은 것을 보면 발해 지배계층은 고구려인"이 라고 말했다.

그는 또 "발해 문화는 전통적인 고구려 문화 토대 위에서 당나라 문화 를 수용했기 때문에 온돌장치 미술양식 무덤양식 등에서 고구려적 요소가 나타나 있다"며 "특히 발해 막새와 불상은 같은 시대 당나라보다는 그 전인 고구려 때 유행했던 고식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발표회에서는 얼마 전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고구려 시대 문터와 배수로 시설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집중적으로 실시한 정비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이번 유적 들은 국내성 시절 고구려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유적들이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은 "이들 유적은 중국측이 발굴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구려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것들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국내성 서벽 유적에서는 문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격퇴 하기 위한 어긋문과 성벽 구조물인 적대(敵臺)가 확인됐다. 어긋문은 어긋나게 쌓은 성벽 양쪽 끝을 연결한 문이다.

이와 함께 물을 빼내는 데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석조 배수로도 발굴됐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이 밖에도 고구려 첫 도읍지인 오녀산성, 마선구 무 덤떼, 환도산성 남문지 등에서 발굴된 유적들에 대한 학자들의 설명도 있었다.

(매일경제 2004-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