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계 “요동공동체론은 日의 ‘만선사관’ 연상"

“고구려가 한국도 중국도 아닌 요동국(遼東國)이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요동지역을 역사적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만들어 놓으면 일본도 만주국(1932∼45)을 근거로 이 지역에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다.”

중국고대사 전공자인 김한규 서강대 교수가 2월 초 출간할 예정인 ‘요동사’(문학과지성사)의 내용이 동아일보(27일자 A19면)를 통해 미리 알려지자 한국사학자들은 김 교수의 ‘요동공동체론’에 대한 학술적 오류를 지적하고 이 책이 끼칠 국제 정치적 파장을 우려했다.

조법종 우석대 사학과 교수는 “요동은 한국과 중국의 변경(邊境)지역이지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한 역사단위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사학자들이 제기한 김 교수의 ‘요동공동체론’의 문제점을 정리한다.

▽종족과 언어가 달랐다? = 고구려가 독자적 종족과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김 교수의 주장에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고대에는 수많은 종족이 서로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다(多)종족 국가를 형성해 갔으므로 현재의 기준으로 종족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언어 문제와 관련해 박경철 강남대 교양교수(고구려사 전공)는 “‘삼국유사’에는 신라 화랑 집단에 고구려 첩자가 숨어들어와 사투리가 심해 발각됐다는 내용이 있다”며 “삼국은 같은 알타이어족으로 편차가 심한 방언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또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년)를 기점으로 언어가 달라졌다는 주장에 대해 박 교수는 “평양 천도는 고구려 발전과정의 한 고비일 뿐 지배집단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문화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평양 천도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 중심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동류(同類)의식이 없었다? = 김 교수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이에 동류의식이 없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송 교수는 “고구려인의 묘지명에 ‘삼한인’으로 돼 있거나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각각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부르기도 했다”며 “김 교수가 사료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백제의 개로왕이 472년 중국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신(백제)과 고구려는 그 근원이 부여로부터 나왔다(臣與高麗 源出夫餘)’고 한 점 △한반도 중심의 지석묘(고인돌)가 요동지역에서도 발견되는 점 등으로 미뤄 당시 고구려와 한반도는 같은 문화권이었으며 양국간 동류의식이 형성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만선사관 부활의 위험성 = 김 교수의 ‘요동공동체론’에 대해 일부 한국사학자들은 ‘만선사관(滿鮮史觀·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묶는 것)’을 연상케 하는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만선사관은 일본의 만주국 건국(1932년)을 정당화하기 위해 1920년대부터 일본 학자들이 제기하기 시작했다. 만주를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사로부터도 분리시켜 한국의 역사를 반도에 한정지으려는 식민사관이다.

최광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요동공동체론’이나 만선사관은 일본과 러시아인들에게 유리한 논리여서 일본이나 러시아가 이 지역에 개입할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2004-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