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고구려 아닌 동북아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시비와 관련해 최근 정부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설기구로 고구려사연구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정부 기구가 아닌 민관학 공동운영의 독립기구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신철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글을 싣는다. 학계의 다른 의견이나 반론을 기대한다. 편집자 오랜만에 정부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지난 7월 한 일간지의 보도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이 우리 사회에 처음 알려진 지 불과 5개월여 만에 고구려사 연구센터 추진이 발표되었고, 그 1개월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설 기구로 올해 2월까지 기구를 설치한다는 구체안이 나온 것이다. 1980년대 초부터 본격화한 한-일간 역사왜곡 논쟁이 20년이 지났지만, 변변한 연구센터 하나 못 세운 것과 비교하면 그 발빠름은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속도에 있지 않다. 얼마나 본질적인 대응에 다가서고 있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정부 발표만을 놓고 보면, 과연 중국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이나 하면서 대응하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내세운 ‘동북공정’은, 단순히 자신들의 영토인 동북지역에 대한 역사연구나 정비사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동북지역에 대한 정비와 더불어 한반도 통일 이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국경지역의 불안을 사전에 대비하고 차단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지만, 본심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한 준비’란 결국 일본을 겨냥하고 있으며, 나아가 미국과 경쟁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 이후 동북아의 패권경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우경화가 동북아의 패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일본이 역사왜곡을 시도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끊임없이 준비하고 만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수십 년간의 노력이 고이즈미 체제에 와서 성사단계에 이른 것이다. 중국 또한 일본의 우경화와 동북아 정세변화에 대한 준비를 1960년대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그것이 2002년에 이르러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세상에 드러내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 박물관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미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임이 명시되고 교육되었던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제 중국은 그들의 교과서에 그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순서를 밟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일본과 중국 모두 동북아 패권투쟁의 방편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수단으로 교과서를 활용하거나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그 동안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화 시대라는 지금까지도 교육부에서는 국사교과서를 움켜쥐고 정권의 홍보지 정도로 교과서를 전락시켜왔다. 동북아, 또는 아시아, 나아가 세계 속에서 한국의 구실을 고민한 흔적은 교과서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기껏해야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교과서 개혁의 발목이나 잡고 있다. 그런 속 좁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 ‘고구려사 연구센터’이다. 그야말로 여론무마용이다. 박정희 독재정권 홍보를 위한 이론 생산 기구로 만들어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산하에 기구를 둔다는 발상이나, 문제의 본질을 고구려 연구의 미흡함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안일함에서 정부의 낮은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결국 공무원들의 조급한 성과주의와 특정집단의 밥그릇 싸움의 야합을 걱정해야 할 판이 되었다. 당국자들은 지금의 동북아 역사전쟁이 관주도의 고구려사 연구로 해결될 문제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바란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정부간의 협의가 얻어낸 것이, 고작 교과서 문제는 언급조차 힘든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설립이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라. 다른 한편으로 문제의 역사교과서를 일선학교에서 거의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낸 것은 한일간 시민연대활동의 힘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보기 바란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동북아, 동아시아를 시야에 넣는 일이다. 중국과 일본의 패권경쟁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할 때다. 그들과 똑같이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패권경쟁에 몰두해 있을 때, 우리는 평화공존을 내세우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남북공조와 한일관계, 한중관계를 하나의 역사인식 속에서 고민하는 새로운 틀이 필요한 것이다. 정부는 바로 그런 일들을 새 기구가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위기는 곧 기회다. 지금이야말로 평화공존이라는 깃발로 동북아 중심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100년 전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외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것을 실현할 힘도 준비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또 역사의 패배를 되풀이할 것인가. 광개토대왕이 영토경쟁에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누렸지만, 이제 우리는 평화경쟁에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신철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한겨레신문 2004-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