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 고대史전쟁] <5> 동북공정의 논리

중국 학계는 1990년대 부터 고구려사를 본격으로 중국사에 귀속시키면서 무엇보다 고구려사의 출발점인 족속(族屬) 기원을 한국사에서 분리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90년대 초반에 중국 학계는 종래의 논의를 이어받아 고구려의 기원을 예맥족이나 부여족으로 보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설정할 경우 한국사와의연관성을 완전히 단절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선조가 중국 은(殷)나라에서 분리됐다는 가설이 제기됐다. 구체적으로 주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의 고이(高夷)를 고구려 선인으로 설정하고 서주대(西周代)부터 중국에 복속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아울러 왕회편의 양이(良夷)를 고조선, 예인(穢人)을 부여ㆍ옥저ㆍ동예, 발인(發人)을 요동 지역 주민의 선인으로 설정한 다음, 각기 별개의 족속으로 파악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의 선조는 고조선이나 부여와 아무 관련도 없게 된다.더욱이 최근에는 고이(高夷)를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전욱(顓頊ㆍ중국 전설 삼황오제의 하나) 고양씨(高陽氏)의 후예라 하고, 고구려 왕실이고양씨의 후예를 자처해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신석기후기 문화인 이른바 홍산문화(紅山文化)가 융성했던 요서(遼西) 일대가 전욱 고양씨 족단의 본거지인데, 이들이 중원 대륙으로 옮겨갈 무렵 일부가동방으로 이주해 고구려 선인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홍산문화의 적석묘와 고구려 초기 적석묘의 유사성을 주요한 논거로 제시했다.

중국만을 위한 영토 지상주의 역사관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역사를 인식했다. 중원대륙의 왕조만 문명화한 나라 곧 중화국(中華國)이고, 주변국은 미개한 이적(夷狄)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화이론에 따르면 중국사의 범주는 중원 왕조에 국한되며 주변 민족은 제외된다.

그런데 현재 중국은 한족(漢族) 등 55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이에 중국은 정부 수립과 더불어 ‘중국은 현재뿐 아니라 자고 이래로통일적 다민족 국가였다’는 논리를 확립, 중국의 모든 민족 나아가 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설정했다.

이로써 전통사관에 따르면 중국사에서 제외될 무수한 소수민족의 역사가 중국 영토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사로 둔갑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역사 주체의 계통을 무시한 채, 오로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의 귀속을 설정하는 ‘영토 지상주의 역사관’인 것이다.

중국은 80년대까지도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파악했다. 아무리 ‘영토 지상주의 역사관’이라 하더라도 고구려인이 명확하게 한민족과 연결되고,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현재의 영토’라는 자의적 기준만으로 역사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선조는 중국인과 무관 하지만 90년대 이후 역사 왜곡의 결과로 고구려인은 중국 화하족(華夏族ㆍ고대 한족)의 후예로 설정됐다. 그 핵심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 ‘일주서’왕회편이다. 하지만 ‘일주서’는 전국시대에 지어진 위서(僞書)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결정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왕회편에는 기원전 10세기 서주의 도성 건설을 기념해 여러 제후와 주변의 이족(夷族)이 모인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무수한 족속이 대부분 실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의심쩍기 짝이 없는 자료에 등장하는 고이가 고구려 선인이라고 볼 근거도 없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고이에 고구려의 ‘고(高)’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고구려는 본래 ‘구려(句驪)’로 불리다가 나중에 ‘고(高)’자가 더해져 고구려로 불렸다. 따라서 고이와 고구려는 아무 연관성도없는 것이다. 전욱 고양씨가 고이의 선인이라는 주장도 논거가 전혀 없다. 전욱 고양씨는 전설상의 인물로 실존 여부조차 불명확하다. 설령 실존했다 하더라도 고이보다 1,500여 년 앞선 기원전 2500년께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직접적인 계승 관계를 설정할 수 없다.

중국 학자들은 요서 일대의 홍산문화가 전욱 고양씨 족단의 산물이라면서고구려 선조도 여기서 갈라졌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홍산문화의 적석묘는 기원전 3000년께 만들어진 반면 고구려 적석묘는 기원전 3~2세기에 조영됐다. 무려 3,000년 가까운 시간차가 존재하므로 양자를 연결해줄 유적이 없는 한 역시 연관을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 선조가 중국 화하족의 후예라는 중국 학자의 견해는 논거가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인의 기원을 한국사에서 완전히 단절시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고 싶어하는 중국 학자들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한민족의 조상 예맥족이 고구려의 선조 고구려의 선조는 신석기시대 이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족속이다. 이들은 본래 ‘예(穢, 薉, 濊)’로 불리다가 전한대부터 ‘예맥(穢貊, 濊貊)’으로 불렸다. 이들 가운데 요동, 현재의 북한 서부지역의 주민집단이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가장 빨리 성장해 고조선을 건국했다. 그 뒤를 이어 송화강 유역의 주민 집단이 부여를 건국했다.

이 무렵 고구려 선조인 압록강 중류의 주민집단은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지못하고 예맥족의 일부로 살아갔다. 그러다가 기원전 3~2세기경 철제농기구를 사용해 농경을 발전시키고 적석묘라는 독특한 묘제를 만들며 독자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주변의 예맥족과 구별되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구려(句麗)’로 불리다가 이것이 고구려라는 국가명으로 정착되자 ‘맥(貊)’으로 불려졌다.

이처럼 고구려의 선조는 고조선이나 부여의 선조처럼 예맥족에서 분화했다. 이들은 중국 화하족과 명확히 구별될 뿐 아니라, 동만주의 수렵민인 읍루족(만주족의 조상)이나 만주 서부의 유목민인 동호족(선비, 거란의 조상)과도 계통을 달리한다.

예맥족 통합으로 한민족 형성의 징검다리 놓아 더욱이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며 고조선 이래 각지에서 흥기했던 예맥족의 여러 주민집단을 하나로 통합했다. 여기에 남쪽의 한족 일부도 흡수했다. 고구려는 각지의 예맥족을 통합한 거대한 용광로였다. 물론 고구려는 말갈족(읍루의 후예)이나 거란족(선비의 갈래) 등 여러 종족도 거느렸고 그들의 일부는 고구려인으로 동화됐다. 이처럼 다종족 국가의 면모를 지녔기 때문에 고구려인을 바로 현재의 한민족과 동일한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고구려인의 주류는 기본적으로 예맥족이었고 이들은 삼국통일을 계기로 남쪽의 한족을 근간으로 한백제인과 신라인과 어우려져 한민족을 형성했다.

한민족의 형성은 발해 멸망 이후 고구려 후예들이 대거 고려로 흡수되면서 일단락됐다. 고구려는 예맥족을 통합해 한민족 형성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민족 형성 과정에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는 승자인 신라와 더불어 당당히 주연의 역할을 담당했다. 가령 고구려 온돌은 남쪽의 마루와 결합해 우리네 전통가옥의 기본구조를 이루었다. 바닥이 평평해 실생활에 편리한 고구려 토기는 동글동글한 백제나 신라 토기를 밀어내고 질그릇의 주류를 차지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민족을 제외하면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만주땅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구려 문화를 온전히 계승한 족속이나 민족을 찾아볼 수 없다. 고구려 문화를 온전히 계승한 역사체는 한민족뿐이며, 그런 점에서 고구려인은 한민족의 조상이고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호규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한국일보 2004-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