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살아있다] 4. 중국의 입장과 의도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 학계의 입장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연구의 권위자인 쑨진지(孫進己) 선양(瀋陽) 동아(東亞)연구센터 주임이 본지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孫주임은 중국 '동북공정'프로젝트 중 고구려사 부문의 대표적인 이론가다.

그의 기고문은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려는 동북공정의 최근 흐름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사를 한국과 중국이 공유할 수 있다는 '일사양용(一史兩用)', 즉 동북공정 이전의 견해를 취한 것이다.

주로 조공.책봉의 문제를 거론했으며, 고구려의 민족기원 문제 등은 "지나치게 외연을 확대하지 말자"는 말로 대신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대표적 소장 연구자인 임기환(한신대 학술원)교수는 중국과 다양한 경계선을 형성하며 전개된 고구려와 고구려 이후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중국 측 주장의 부당성을 두루 반박하고 있다.

孫주임은 "학자들이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진행해야지 양국의 우호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사는 고구려사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임교수의 지적에선 대화의 여지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두 학자의 기고문에는 양측 주장의 핵심과 쟁점이 선명하게 집약돼 있다. [편집자]

*** "고구려 영토 ⅔ 중국이 계승"

고구려는 현재 영토상으로 중국과 북한에 걸쳐 있었던 고대 민족과 정권의 주체로, 그 계승과 역사적인 귀속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중국과 남북한의 우호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고구려의 현실적인 계승은 중국과 남북한의 현실적인 국경에 따라 결정된다. 중국.남북한의 국경은 지난 1천년의 역사발전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양측 정부의 조약에 따라 승인됐다. 따라서 이 국경으로 고대 고구려 국토와 거주민들의 귀속을 자연스레 획정할 수 있다.

고구려의 대략 3분의2에 해당하는 영토와 4분의3 정도 되는 인구는 현재 중국의 영토에 있었으므로 중국이 계승하고 있다. 고구려의 3분의1 정도 되는 영토와 4분의1이 되는 인구는 즉 북한(한국)에 의해 계승됐다. 누구도 중국.남북한 양측이 고구려를 공동으로 이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 역사를 함께 이용(一史兩用)'할 수 있되, 자기네 부분을 각자 사용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고구려 영토와 인민의 역사 및 문화유산을 이어받았고 남북한은 그 이남의 것을 계승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고구려사가 어느 한 국가에 속한다고 강조할 수는 없다. 마땅히 함께 선조들이 남겨 놓은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구려사가 어느 나라에 속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순전히 학술적인 문제다. 누구도 1천여년 전의 귀속문제를 가지고 오늘날의 국경을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유지하면서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진행해야지 이로써 양국의 우호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필자는 양국 학자들이 토론을 통해 같은 의견은 축적하고 이견은 남겨두면서(求同存異) 점차 일치된 견해로 나아갈 것으로 믿는다.

아울러 고구려 문제의 외연을 지나치게 넓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민족기원.영토기반 등이다. 고구려 성립 이전이나 멸망 이후를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작다. 고구려의 역사적인 귀속은 당시 정치적으로 누가 다스렸으며 경제.문화적으로 누가 고구려와 관계를 지녀왔는가 등으로 따져야 한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고구려왕 책봉을 받아들였으며 중국 중앙 및 지방관리로 책봉됐다.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과 평주자사(平州刺史) 등의 직함이 결국 고구려가 역사적으로 중국에 예속됐다는 것을 증명한다. 세계 역사상 어느 한 나라가 자원해 다른 나라의 중앙 및 지방관리가 되고 스스로 독립국가라 호칭한 적은 없었다.

책봉됐기 때문에 곧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논리는 아니다. 고구려 당시의 이러한 특정 책봉관계가 중국으로의 귀속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후 왕씨 고려와 이씨 조선은 '고구려왕'과 조선국왕의 책봉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의 중앙 및 지방관리를 맡지는 않았다. 따라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방정권은 복속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반란을 일으킨다. 복속이 위주였느냐, 아니면 독립 지향적이었느냐를 따져야 한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은 전체 역사과정 중에서 귀속을 위주로 했기 때문이다. 신라.백제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비록 중국의 관직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일시적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고구려는 역사상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지만 한반도로 진입해 남북한의 역사 일부분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로마제국이 점령했던 프랑스의 일부가 나중에 프랑스 역사의 찬란한 일부를 이룬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결국 역사일 뿐이다.

쑨진지(孫進己) 중국 선양(瀋陽) 동아(東亞)연구센터 주임

(번역=유광종 베이징 특파원)

*** "漢族 중심 패권주의 발상"

중국 지안(集安)시 하해방이란 곳에 모두루(牟頭婁) 무덤이 있다. 이 무덤에는 모두루라는 고구려 귀족의 묘지(墓誌)가 쓰여 있어 매우 중요하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로 시끄러운 요즈음 새삼스럽게 묘지의 다음 대목에 눈길이 간다. "하백의 손자이고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은 본래 북부여로부터 나왔다. 천하 사방이 이 나라가 가장 성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니…."

5세기에 고구려인의 손에 의해 직접 쓰인 이 한 구절이면, 중국이 주장하는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지방정권'이라는 논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 종족을 중화족의 하나인 고이(高夷)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구려인은 스스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이런 선언은 광개토왕비의 첫머리에도 있으며, 당시 중국 측 기록에서도 모두 인정하고 있다. 부여계라는 점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동류의식마저 갖고 있었다. 이렇게 족원 의식에서 고구려사는 이미 그 경계가 분명해진다.

중국 학계 주장의 또 다른 논거는 조공.책봉 관계다. 즉 고구려왕이 중국의 지방관직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조공.책봉관계가 국가 간의 외교 형식에 불과함은 일찍이 밝혀진 바다. 오히려 중국의 남북조 왕조는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루 묘지에서 보듯 고구려인 스스로 자기 나라를 천하(天下)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천하와도 다르고 유목민의 천하와도 다른, 고구려 독자의 천하세계였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이 고구려 천하에는 백제.신라.동부여가 속하였으며, 왜와 후연 등은 제외됐다. 이렇듯 천하관에서도 고구려사의 경계선이 뚜렷이 드러난다.

따라서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이란 곧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요구하는 수.당과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려는 고구려 간의 대립이었다. 즉 두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허물려는 힘과 이를 지키려는 힘의 충돌인 셈이었다. 중국이 주장하듯이 결코 중앙과 지방 사이의 내전이 아니다. 여기서 고구려는 패했고 국제질서는 재편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계승은 또 다른 경계선을 만든다. 통일신라에서는 '삼한일통(三韓一統)'이라는 삼국통합 의식이 나타났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표방했다. 고려는 국호부터 따랐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담긴 고구려사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정리된 바 없었다. 역사 의식만이 아니다. 고구려인이 만들고 향유했던 문화적 자산도 이어졌다. 문화와 역사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경계가 만들어진 셈이다.

물론 고구려사가 갖는 이런 경계선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사의 테두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고구려사라는 경계선은 고구려인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 그 자체를 뜻한다.

현재 중국 학계는 이러한 경계선을 무시하면서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다. 고구려를 한낱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게 되면, 고구려의 주체적 역사상을 송두리째 잃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실 이는 고구려사 문제만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역동적이고 주체적인 역사들이 '중국사'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묻혀 버린 점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이는 한족(漢族) 중심의 패권주의적 역사인식이 초래한 결과다. 그러한 잘못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충분히 경계해야 함은 물론, 동시에 우리 자신도 '민족사'라는 이름으로 그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냉철하게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사는 고구려사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교수 고구려사

(중앙일보 200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