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스터리] 살수대첩의 진실

고구려는 뛰어난 전략과 작전수행능력으로 수나라에게 엄청난 타격과 공포를 준 나라였다. 그 중에서도 서기 612년 수나라 장수 우중문이 청천강(살수)에서 30만 대군을 잃고 퇴각한 살수대첩이 유명하다.

“그대의 작전은 참으로 신묘하다. 천문지리에도 통달하였구나! 연전연승으로 이겨서 공도 많이 세웠으니 그만하면 이제 멈출 때도 되었네 그려.”

이렇게 을지문덕 장군이 시를 적어 보내어 약을 올렸다. 파죽지세로 평양성 30리까지 진격해왔던 수나라의 우중문은 조롱하는 시를 받아들고 나서야 고구려의 유인작전에 속은 줄 알아차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수(청천강)에서 강을 건너려 할 때 갑자기 상류에서 폭포수 같은 물결이 밀려왔다. 그때 매복했던 고구려 군사들이 강 양쪽에서 나타나 힘껏 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전투가 잠잠해져서 다시 군사들이 건너려고 하면 또다시 상류에서 큰물이 밀려닥쳤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자 군사가 대다수 물에 떠내려가서 반나절 만에 30만대군이 2천명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다.

당시의 수공법(水攻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을지문덕 장군에게 직접 물어 보았다.

“모두들 큰 보(堡)를 하나만 만들어서 물을 막아 놓고 한꺼번에 쏟아낸 걸로 생각하지요? 그리고 수문을 여닫으면서 시간차를 두고 파상공세를 벌인 줄 아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장군은 모래밭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시며 근엄한 미소를 지으며 당시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살수대첩이 벌어진 청천강은 장마철이 아니면 가볍게 다리를 걷어붙이고 건널 수 있는 깊이의 비교적 강폭이 좁은 하천이다.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미리 다섯 개의 보를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댐을 5중으로 만든 것이다. 첫 번째 보는 수나라 군사들의 눈에 띄지 않는 동북 쪽 물돌이 자리의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거기서부터 5리(2㎞) 간격으로 설치되어 마지막 보는 싸움터에서 약 25리 정도 떨어진 자리였다. 그리고 모든 보는 목책으로 단단하게 짠 것이어서 좀처럼 수압에 무너지지 않게 설계된 것들이었다.

“쳐들어 올 때는 기세 등등하더니 도망칠 때는 정말 꼴불견이었지요. 차례차례로 보를 터뜨려서 한번에 수만명씩 속 시원하게 쓸어 내려보냈습니다 .”

이뿐 아니라 32년 뒤의 안시성 전투에서도 당 태종이 성주 양만춘의 버티기 작전에 걸려들어 혼쭐나고 도망간 일도 있다.

지략이 높은 고구려는 침략자 중국에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13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용맹스러운 고구려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무서운 나라로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해 있다. 따라서 중국은 새삼스럽게 그 역사를 도둑질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고구려를 자기 나라로 만들어야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김세환 대영계연구소장)

(스포츠투데이 2004-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