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10년간 준비…우린 뭘했나"

93년 '아! 고구려'전시회 주역이 말하는 '고구려史'
"350만 관람객 가슴에 불탔던 고구려 불씨 살려야"

엊그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북한 중국이 제출한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하도록 권고키로 결의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한달 넘게 온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고구려사 문제가 최악의 위기는 넘긴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로 중국 쪽 고구려 유적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고 평양 인근의 고구려 유적들은 등록되지 못해, 세계인들이나 우리 후세들의 인식에 마치 고구려사의 무게 중심이 중국 쪽에 가있는 것처럼 비쳐질지도 모를 경우를 생각하면 끔찍한 일입니다. 아마도 ICOMOS의 멤버들도 문화유산을 다루는 자기네들의 결정이 이렇게 복잡한 정치적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을 생전 처음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차분한 접근과 해결책 모색은 이제부터입니다. 지난 한달 여 우리는 고구려사에 관한 한 극도의 흥분 상태였습니다.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 고구려사와 관련해 국내 언론에 나온 기사의 건수(件數)는 그 이전 10년 동안 나왔던 기사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어떤 나라입니까. 한민족사의 발원지(發源地)에 해당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지금 그 나라의 한 때 수도가 자기 영토 안에 있다고 해서 그 역사마저 자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식 신(新)중화사관의 오만함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식 오만함은 우리의 들끓는 분노만으론 깨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흥분과 분노를 에너지 삼아 차분하게 중국에 대한 비판 논리를 개발하는 한편, 고구려를 영원히 우리 것으로 간직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 계획이 알려진 이후 저는 여러가지 복잡한 상념 속에 지내야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한국 언론 최초로 중국 집안시의 고구려 벽화고분을 촬영 취재 보도하고 ‘아! 고구려’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 가슴 속에 고구려의 불꽃을 지핀 게 조선일보이고, 그 담당기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 당시 이미 중국은 고구려사가 자기네 역사의 일부라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었고 이같은 사실은 조선일보를 통해서도 보도가 됐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와서 중국은 훨씬 더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규모로 고구려사 편입을 강행하고 있는데 그동안 우리는 어떤 대응 준비를 해왔나 하는 물음이 첫째였습니다. 먼저 다소 길더라도 1993년 8월 제가 조선일보에 썼던 신문기사 그대로를 일부 옮겨보겠습니다.

“고구려는 누구의 역사인가.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은 중국 때문이다. 명백히 한민족의 조상이며 한민족 문화의 원류를 이루고 있는 고구려를 중국 학계는 ‘고대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정권이었으며 따라서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조상’이란 궤변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남-북한과 중국 일본 대만 홍콩 학자들이 참여해 집안에서 열린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회의에서도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집안박물관의 경철화(耿鐵華) 부관장이 ‘나 개인의 학설이자 중국 동북 지방 역사학 및 고고학의 성과’라고 전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서기 427년부터 고구려가 조선역사와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 문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의 용(龍) 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술 더떠 ‘신라도 고대 우리 동북아 선조들이 남긴 문화’라며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문화 유산들을 보호-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경철화가 바로 이번에 밝혀진 동북 공정에서도 ‘고구려=중국사’라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며 맹활약(?)중인 그 인물입니다. 경철화의 발표 후 많은 한국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발언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통상 이런 학술모임은 예정시간을 넘겨 진행되기 마련인데, 이날은 폐회 예정시각이 30분이나 남았으나 사회자가 서둘러 행사를 끝냈습니다. 다음날에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아예 종합토론 순서를 생략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일보가 취재에 나선 것은 고구려 국제학술회의를 계기로 중국 문화재 당국이 참가학자들에게 고구려 고분 벽화를 공개한다는 정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일보사는 아예 한국의 해외한민족연구소, 중국의 조선사연구회와 공동으로 이 학술회의를 공동주최하기로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막상 가보니 중국 학자가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취재가 제대로 될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고분 벽화 촬영에 나섰을 때의 비감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때 동북아를 호령했을 우리 대륙왕국 고구려의 성벽과 고분들이 무너져내린 채 방치되고, 그 안의 벽화들에 금이 가고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걸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안타까웠습니다. 분명 내 나라 내 역사의 문화재건만 남의 땅에 있다는 이유로 접근이 봉쇄되고, 그 안위(安危)를 걱정하는 것조차 주제넘은 짓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는 슬픔과 분노가 함께 밀려왔습니다. ‘환도산성’은 평범한 야산같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불과했지만 그곳을 가보는 것조차 그들은 막았습니다.

새벽에 가면 좀 나을까 눈 비비고 나갔더니 그 미명(未明)의 안개 속에 중국인 감시원이 벌써 나와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정작 그들은 용접기 하나로 그 귀중한 벽화 고분들을 마음대로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1500여년 전의 고구려 선조들이 남겨놓은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지금도 당당히 살아남아 저처럼 빛을 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해서 300여 컷의 벽화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걸하듯 하면서도 사진을 찍어야만 했던 것은 이것이 우리 손으로 찍는 최초의 고구려 벽화 사진이 될 것이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도 물론 고구려 벽화에 관한 책이 있고 거기에 벽화 사진이 실리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진들은 일제시대 때 찍은 흑백사진이 대부분이어서 지금 벽화의 실상을 전해줄 사진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집안에서 취재를 하면서 기막힌 얘기들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 귀중한 문화유산이 있는 고구려 고분들이 6.25 때는 중공군의 군대 막사처럼 쓰이기도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한때는 거지들의 숙소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 벽화가 남아있는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해서 불이라도 한번 났다면 벽화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실 삼실총이나 각저총 등은 상당히 훼손이 진행돼 일제시대 사진과 비교하면 여기저기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촬영한 벽화 사진들은 역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연재가 거듭되면서 독자들의 요구는 벽화들을 실물 크기의 사진으로 볼 수 없느냐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흔쾌하게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단순한 옛날 유적 사진들이 아니다. 한국미를 상징하는 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이 할 일이다.”

전국적으로 350만명을 불러모은 ‘아! 고구려’ 전시회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그 추운 겨울, 과천 골짜기에 있는 현대미술관으로 하루 5000~6000명이 온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현대미술관의 하루 평균 관람인원은 500명도 안됐습니다.

결국 서울 전시는 연장 전시까지 하며 49일간 43만 8000명이라는 현대미술관 사상 기록을 세우며 끝났습니다. 이어 부산 인천 대구 대전…, 어딜 가나 전시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냥 평범한 벽화 사진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국민은 거기서 대륙에서 꽃피었던 고구려의 혼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잊혀졌던 왕국 고구려를 향해 피어나는 불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해서는 대응방법이 중요합니다. 지난 달 말 17개 역사학 연구 단체들이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 “중국은 패권주의적 역사 왜곡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또 민족사관고 학생들과 시민단체들이 서울에 있는 중국대사관에 가 시위하고 항의 표명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계 문화유산 등재 여부에 자문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멤버들에게도 감정 섞인 이메일 공세를 했다고 합니다. 다 있을 수 있는 의사표명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고구려가 한국사일 수밖에 없는 백 가지 천 가지 이유를 들이댄다 해도 중국은 동북공정을 포기하고 우리 학계에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분고분 사과할 리 없습니다.

남을 비판할 건 해야겠지만, 이완 별도로 우리는 그동안 고구려를 얼마나 알고 사랑해왔나 돌아봅니다. 우리에겐 10년 전 ‘아! 고구려’ 전시회를 보고 열광했던 350만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웅장한 고구려 역사를 소재로 해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대서사시나 뮤지컬 오페라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못 들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그 기막힌 문양과 귀부인 패션들이 현대화된 디자인이 성공해 세계에 진출했다는 얘기도 못 들었습니다.

그 때 350만명의 가슴에서 활활 탔던 고구려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일부에선 고구려를 얘기하는 것이 국수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고구려가 있던 중국 땅을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엄연한 내 역사의 혼을 잊자는 것이 왜 지나친 민족주의가 됩니까.

지금 남의 영토가 됐다고 그 문화와 정신마저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사랑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조선일보/김태익 논설위원 2004-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