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우리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비판하며 곧잘 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중국이 한족(漢族) 등 55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라는 사실이다. 단일민족국가인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바로 다민족국가라는 그들의 현실에서 잉태되었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역사를 인식했다. 중원왕조만 중화국(中華國)이고, 주변국은 이적(夷狄)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중국사는 중원왕조에 국한된다. 이에 중국은 정부수립과 더불어 '중국은 현재뿐 아니라 자고 이래 통일적 다민족국가였다'는 논리를 확립해,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 나아가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를 중국사로 설정했다.

1949년 중국정부 수립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다민족국가를 과거 속으로 투영해 가공의 중국사를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는 급기야 고구려사 마저 자기네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다. 이러한 역사왜곡에는 한반도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중국의 국가전략이 깃들어 있다니, 그들의 말처럼 '고위금용(古爲今用)' 곧 과거 역사가 현재를 위해 자의적으로 활용되는 역사왜곡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도 종종 중국인들과 비슷한 우를 범하곤 한다. 최근 고액권 화폐 모델로 광개토왕이 가장 많이 거론되었듯이, 우리는 고구려하면 광개토왕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광개토왕이 개척했다는 광활한 영토로 꿈의 나래를 활짝 펼치다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아쉬움에 빠진다.

우리는 이러한 상상과 아쉬움을 토하며 자신도 모르게 현재의 단일민족국가를 과거 속으로 투영한다. 삼국이 마치 남북한처럼 본래부터 하나의 민족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 삼국이 자웅을 겨룰 무렵, 한민족은 아직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고 형성의 도정에 있었다.

우리 민족은 북쪽의 예맥족과 남쪽의 한족(韓族)의 융합으로 형성되었다. 예맥족과 한족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던 같은 계통의 족속이다. 신라 청년 거칠부가 고구려로 들어가 혜량 스님의 설법을 들은 일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다만 오랜 세월 격리되어 있으면서 이질성이 많이 증가했다.

이 가운데 고구려는 예맥족에서 분화했다. 예맥족은 일찍부터 만주 중남부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농경을 영위했는데, 중국의 한족(漢族)과 명확히 구별될 뿐 아니라 동만주의 수렵민인 읍루족(만주족)이나 만주 서부의 유목민인 동호족(선비.거란)과도 계통을 달리한다. 이들 가운데 요동~서북한의 주민집단이 가장 빨리 성장해 고조선을 세웠고, 곧이어 송화강유역의 주민이 부여를 건국했다. 압록강 중류일대의 주민집단은 서기전 2세기경에 이르러 '구려'라는 독자적인 정치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예맥족은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동일 족속이지만, 선후를 달리해 지역별로 별도의 정치체를 형성했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족속 계통이기는 하지만, 아직 동일 운명체 의식은 없었다. 이들의 역사와 문화가 고구려를 거쳐 현재까지 계승된다는 점에서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예맥족이 곧 한민족과 동일한 실체는 아닌 것이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3세기까지 원고구려인과 피정복민을 엄격히 구별했다. 그리해 중국인들 마저 3세기 중반경 원고구려인과 고구려에 예속된 동옥저나 동예인을 엄격히 구분했다. 피정복민을 포괄하는 고구려인 의식은 4세기 이후 집권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동옥저나 동예인 뿐 아니라 한족(韓族)과 부여인 나아가 말갈족(읍루의 후예) 일부까지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었다.

이처럼 고구려인의 외연은 멸망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더욱이 고구려 영역 안에는 거란 등 생활양태가 달라 고구려인으로 동화하지 못한 종족도 많았다. 고구려는 예맥족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족속을 흡입하던 거대한 용광로 곧 일종의 다종족 국가였던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사를 한민족이라는 현재의 잣대로만 바라봐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포괄하며 광활한 영역를 운영했던 대제국의 면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한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때, 고구려사의 전모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고구려인이 한민족과 관계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조선 이래 흥기했던 예맥족의 여러 주민집단은 고구려라는 용광로로 용해되어 하나의 역사체로 거듭 태어났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 일부가 중국대륙 등으로 흩어졌지만, 고구려사는 통일신라와 발해를 거쳐 고려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민족사의 거대한 형성과정과 고구려라는 특정한 역사체를 밀접히 연관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히 구분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의 민족이라는 잣대로는 도저히 담기 힘든 고구려사의 다양한 성격을 분석할 보다 거시적인 시각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여호규 교수 한국외국어대.고구려사)

(중앙일보 2004-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