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보다 대응논리를

민족혼이 숨쉬고 있는 고구려사를 지키려는 국민의 열정이 이역만리 프랑스 파리에서까지 느껴질 정도로 후끈하다.

고구려를 자기들 역사 속에 끼워넣으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사업은 우리 정부나 학자뿐 아니라 온 국민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저지해야 마땅하다. 이번 사태가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고구려나 발해사 연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국내 일부 시민단체나 네티즌들의 움직임을 보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보다 흥분부터 하고 보는 측면이 엿보여 안타깝다. 무엇보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그렇다.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라도 하면 고구려 역사를 통째로 중국에 빼앗기기나 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파리의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자기들 눈에 '제3국'인 한국에서 집단으로 날아드는 항의 메일에 영문을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세계유산은 문자 그대로 개별 국가 차원을 넘는 전 세계의 공동유산이다. 후손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는 인류의 유산을 다함께 보호하자는 취지다. 프랑스의 세계문화유산 28개 중 남부 아를과 오랑주의 유적, 퐁 뒤 가르(수도교) 등은 프랑스가 신청했지만 엄연한 로마 유적이다. 스페인의 문화유산인 알함브라 궁전이나 코르도바 역사유적을 이슬람권 무어족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루살렘처럼 영토분쟁 중인 지역은 이웃나라 요르단의 신청으로 구시가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물론 중국의 신청 의도가 단순한 문화재 보호 차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행히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전문가들은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모두 등재하자"고 권유했다.

문제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동북공정이다. 항의 시위나 집단 e-메일보다 고구려사를 한줄이라도 더 읽어 중국에 맞설 대응논리를 개발하고, 이를 토대로 국제사회를 설득하는 게 낫다고 본다.

(중앙일보 2004-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