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감정적·정치적 대응은 오히려 불리해"

국제유적협의회 참석 한국대표단 이혜은 교수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우리의 고구려 유산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길입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 한다는 최근의 ‘고구려사 논쟁’ 때문에 국내 일부에서는 북한의 고구려 유적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두 문제는 분명 별개로 접근해야 합니다.”

16~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전문가 회의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라고 유네스코 산하 세계유산위원회(WHC)에 추천했다.

고구려 유적 세계유산 등재를 지원하는 홍보 활동을 펼쳤던 한국 대표단의 민간 전문가 이혜은 동국대 교수는 “국내 일부 네티즌들이 ICOMOS 사무국과 집행위원들에게 북한의 등재를 지지하는 이메일을 수천~수백통 보내 현지에선 상당히 반감을 자아냈다”고 우려를 전한다.

“ICOMOS는 정치성을 배제한 전문가 집단이에요. 수백통의 이메일을 받은 한 ICOMOS 위원이 ‘이 문제가 지나치게 정치 쟁점화될 경우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다’고 해서 순간 아찔했습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나라에서만 하도록 되어 있다. 이 교수는 유럽 곳곳의 로마 유적이 여러 나라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을 예로 든다.

“북한의 유적만 등재해 달라고 고집하다가는 나머지 소중한 고구려 유적들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길이 영영 사라진다”며 “좀더 폭넓게 문제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 99년 설립된 ICOMOS 한국위원회에서 4년간 사무총장으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ICOMOS 한국위 집행위원 겸 감사를 맡고 있다. 그동안 세계 ICOMOS 총회에도 여러 차례 참석한 경험을 살려 이번에 홍보단에 참가했다.

이번 ICOMOS 회의 결과, 6월 말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열릴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최종 결정까지는 여전히 지켜보아야 할 일이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ICOMOS가 미국 옐로스톤 공원을 ‘위기에 빠진 위험 유산’에서 빼자고 추천했는데 네티즌들이 수천통의 이메일을 보내고 난리를 쳐서 결정이 뒤집힌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키고 싶다면 학술 연구와 보존 지원 등 전문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조선일보 2004-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