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협약 [ 間島協約 ]

1909년(융희 3) 9월 청(淸)나라와 일본이 간도(젠다오)의 영유권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

일시 : 1909년 9월
목적 : 간도영유권분쟁 해결
해당국가 : 청, 일본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 영유권 문제는 한 ·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 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개발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쳬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 ·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이루되, 일본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 ·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국정부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吉林] ·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간도문제 [ 間島問題 ]

두만강과 그 지류 연안의 평야 및 구릉으로 형성된 중국 지린성[吉林省] 간도지방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淸)나라 사이에 있었던 분쟁.

간도(젠다오)는 본래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였으며, 고구려 때에는 파루(把婁)의 땅으로 고구려에 속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발해가 5경(五京)을 두었을 때에는 동경(東京)의 용원부(龍原府)에 속하기도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후 여진족이 살면서 이 땅을 자주 침범하므로 고려 시대에는 윤관(尹瓘), 조선시대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정벌하였다. 세종은 이 지방에 6진(六鎭)을 두었고, 여진족은 번호(藩胡)라 칭하여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청나라 건국과 함께 여진족이 중국본토로 이주하자 청나라는 간도를 봉금지(封禁地)로 설정하여 주민의 이주를 금하였으나, 산둥[山東]지방 등의 유민과 조선 사람들이 많이 잠입하여 청국인과의 대립이 잦았다.

1710년(숙종 36) 조선인이 청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양국의 불분명한 땅을 조사시키기 위하여 오라총관(烏喇摠管:吉林) 목극등(穆克登)을 이 지방에 파견하고 국경실사(國境實査)를 명하였다. 목극등은 12년 조선의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회담하고, 압록 ·토문(土門:松花江의 지류) 두 강의 분수령인 백두산 산정 동남방 약 4km, 해발고도 2,200m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그 비문에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이 있으니, 그 분수령 위에 돌을 세우고 기록한다…”라고 새겼다. 여기에 지칭한 토문강은 분명히 쑹화강의 지류로서, 두만강의 상류가 아님에도 후일 청나라는 이것이 두만강을 지칭한 것이라 하여 간도귀속을 둘러싼 양국의 분쟁의 씨가 되게 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인은 계속 봉금(封禁)을 무시하고 간도에 이주하여 개척하였으며, 한인(漢人)도 이 지방에 이주하여 서로 섞여 살게 되었다. 그러자 청국은 1882년(고종 19), 토문강 이북 ·이서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청국인으로 간주하겠다고 통고하고, 그 이듬해 간도를 개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부분의 조선인을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간도국경문제 해결을 청나라에 제의, 토문강 이남은 조선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나라는 ‘토문강이 곧 도문강(圖們江:두만강)’이니 두만강 이북은 자국영토라 주장하여 3차에 걸친 회담이 모두 결렬되었다.

이와 같은 분쟁은 1894∼95년 청 ·일전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1900년(광무 4) 청나라의 약세를 틈타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였다. 정부에서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에 파견하여 주민을 위무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그를 북간도관리사로 임명하며 이를 주한청국공사에 통고하는 한편,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올려받아 계속해서 간도영유권을 관철하여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에 따라 간도문제는 청 ·일 간의 현안문제로 넘어가고, 일본은 1907년(융희 1) 간도에 통감부(統監府) 출장소를 설치하여 군대 ·헌병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으나 그 근본목적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떻든 일본은 처음에 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며, ② 한국인을 중국의 재판에 굴복시키지 말 것, ③ 중국관헌의 대(對)한국인 세금징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④ 중국관헌이 발하는 대(對)간도의 모든 법령은 통감부 파출소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러 ·일전쟁 후 러시아에서 얻은 철도 ·탄광 등 만주에 있어서의 이권문제가 엇갈리게 되자 양국협상을 통하여 ‘청나라는 일본이 간도가 청국영토임을 인정하면 만주에 있는 일본의 이권에 대해 양보하겠다’는 확약을 받고, 1909년(융희 3) 9월 4일 한국영토인 간도를 마음대로 청나라에 넘겨 주는 ‘간도에 관한 청 ·일협약(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에 따라 통감부 간도파출소는 폐쇄되었으나 일본총영사관으로 대체됨으로써, 간도에 있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을 억압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그대로 지속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집중화할 수 있는 효과까지 얻었다. 1909년 현재 간도지방 주민조사로 나타난 한국인은 8만 2,900여 명이고, 청국인은 2만 7,300여 명이었다.

간도 [ (젠다오) ]

중국 둥베이[:滿]의 지린성[]을 중심으로 랴오닝성[]·헤이룽장성[] 일대 한국인 거주지역의 통칭.

한국에서는 간도(·)·간토()·북간도라고도 한다. 서(西)젠다오와 동()젠다오로 구분되는데 한국에서 간도는 보통 동젠다오를 가리킨다. 남쪽은 두만강(滿)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하고 동쪽은 러시아의 연해주(沿)에 접한다.

지형은 남서쪽에
백두산(2,744m)을 주봉으로 하는 창바이산맥[]이 달리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으로는 다리링[]·라오예링[]·장광차이링[] 등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5월 초순까지 강설과 결빙이 계속된다.

원래
여진족의 거주지로 조선 초기에는 번호()라 하였고, 그들의 조공을 받아들였다. 청()이 세워진 후 오랫동안 한광지대()로 존속되어 오다가 한국인 유민()이 들어가 미개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백두산 분수령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그후 조·청 사이에 국경분규가 계속되어 오다가 국권침탈 이후
일본이 독단으로 젠다오의 영토권을 청에 넘겨주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임업이 활발하여 옌지[]에서는 훈춘재[]·젠다오재[]라고 하는 목재를 산출한다.

옌지 분지는 한민족이 최초로 벼를 이식한 곳으로 수도작()이 이루어지며, 그밖에 콩·수수·옥수수·보리 등도 재배된다. 광물자원은 석탄·함유셰일·구리·납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룽징[]에는 제강, 라오터우커우[]·허룽[]에는 탄광, 톈바오산[]에는 구리·납 광산이 있다.

간도참변 [ 間島慘變 ]

1920년 간도에서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하여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

언제 : 1920년 10월
어디서 : 간도
누가 : 일본군
무엇을 :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
어떻게 : 무차별 대량학살
왜 :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분풀이

1920년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경신참변 또는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한다. 3 ·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여러번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는 위협 반 회유 반으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정당화할 사건을 조작할 음모를 하였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 마적()을 사주하여 훈춘현[]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다. 그러나 독립군이 사전에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 속 또는 중·소 국경지대로 이동해 버림으로써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특히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작전을 전개하였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국인 마을들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다. 옌지현[] 이란거우[]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이 몰살을 당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 간 간도일대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피해자는 적어도 수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