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핵심은 간도 ?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고구려 빼앗기'로 축소해서 생각하지 말라. 중국이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하는 '동북아전략기획서'다."

국내 전문가가 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동북공정의 본질이다. 이는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www.chinaborderland.com)에 실려 있는 동북공정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북지구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로 중대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부 국가의 연구자와 기관'이 역사 사실을 왜곡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잘못된 이론을 선전하고 혼란을 야기했다. 이 때문에 동북변경에 대한 연구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으며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일부 국가들의 연구자와 기관'은 남북한을 지칭한다. 동북공정의 주요 작업은 ▲고대중국영토연구 ▲동북지방사연구 ▲동북민족사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연구 ▲중-조(中-朝)관계사연구 ▲중국 동북변경 및 러 시아 원동지구의 정치-경제 관계사연구 ▲동북변경의 사회안전전략연구 ▲조선반도 형세 변화 및 이의 동북 지역 안정에 미치는 영향연구 등이다. 한마디로 동북 지역에 대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고구려 전문가인 김용만씨는 "동북공정의 핵심은 고구려 역사가 아니다. 고구려사는 겉으로 드러난 일부분일 뿐"이라며 "중국은 남북통일 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동북공정은 한민족의 동북 지방 유입 역사와 현황에 주목한다. 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조선반도 형세 변화의 동북 지역 안정에 대한 충격'이라는 문건은 "조선반도의 형세 변화는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 등에 큰 충격파를 줄 수 있다"며 "연구의 주안점은 첫째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조선반도의 동란과 난민들의 동향, 둘째 현재 길림성 중-조 국경의 현황"이라고 명시했다.

한민족 간도 유입역사 중점 연구

19세기 후반과 일제 시대를 거치며 많은 조선 사람이 만주에 들어갔고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한반도 유사시 또다시 많은 북한 난민이 동북 지역으로 들어오고 이 지역이 '한민족 근거지화'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한 국내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재 동북 지역에 조선족이 1백만 명 이상, 탈북자가 수십만 명이 있다.

만약 남한 주도로 남북통일이 이뤄지면 북한 공산당 및 군부의 강경 세력들은 '무기'를 들고 동북 지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2003년 중국이 조-중 국경지대의 수비병력을 인민해방군 15만 명으로 교체한 것도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은 일제 시대 때 만주가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던 것처럼 남북통일 뒤 이 지역이 한민족의 또다른 근거지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일부 전문가는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함으로써, 유사시 북한 지역에 대한 연고권까지 내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근본적 동기를 알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은 "중국 역사를 보면 소수민족이 한족(漢族)을 지배한 역사가 3분의 1이 넘는다"며 "이 때문에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5호16국-요-금-원-청 등 북방 이민족이 끊임없이 한족을 지배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644년 중원을 공격했을 때 그들의 인구는 3백만 명에 병사 수는 16만~20만 명에 불과했다. 당시 한족의 인구는 1억5천만 명(1850년대는 4억3천만 명) 정도였다. 3백만 명의 만주족이 100배가 넘는 한족을 267년간이나 지배했다.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중국 정부

[중국정부백서]에 의하면 1995년 중국 전체 인구는 12억7백78만 명이다. 이 가운데 55개 소수민족은 1억8백46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8.98%다. 1998년 현재 자치구-자치주 등 155개의 중국 소수민족 자치 지역이 중국 전체 면적 9백60만㎢의 64%에 이른다.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는 소수민족의 집중 거주 지역이 중국 면적의 3분의 2나 된다.

역사상 이들 지역을 한족 왕조가 확실하게 장악한 적은 없다. 중국 서부 신쟝위구르 자치구만 해도 1755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준가리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중국 영역에 들어왔다. 티베트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만주로 알려진 요녕-길림-흑룡강의 동북 3성도 만주족이 중원을 점령하면서 현재의 중국 영역에 들어갔다. 만주족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호하고 한족에 왕조가 멸망당한 뒤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1860년대까지 만주 지역에 한족들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령(封禁令)'을 내렸다.

1812년 동북 3성의 인구는 1백70만 명이었다. 30년 뒤에는 3백만 명, 봉금정책이 풀린 1897년에도 7백만 명에 불과했다. 1997년에는 1억6백97만 명으로 100년간 1억 명이 늘었다. 그동안 한족이 많이 이주했고 이들의 출생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즉 만주 지역이 한족들의 확실한 거주지가 된 것은 100년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은 2백만 명의 인구로 중국 밖에 모국이 있고 어느 정도 국력이 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대단히 두려워한다. 

중국 정부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운다. 중국은 한족을 비롯한 56개 민족이 있지만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을 중심으로 한 다수민족이 '통일'(大一統)을 견지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시각과 함께한다. 그들에게는 청나라-원나라 등 이민족이 세운 나라도 모두 '중화민족 왕조'이다. 칭기즈칸도 '중화민족'이다.

그러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한 실례로 근대 중국을 연 1911년의 '신해혁명'만 해도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흥하게 한다'는 한족의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결국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위구르족-티베트족-몽골족-조선족-대만 등의 독립을 막으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간도 문제로만 가도 중국 정부는 대단히 곤혹스럽다. 간도는 1909년 일제가 간도협약을 통해 만주철도부설권-푸쉰 채광권을 얻는 대가로 청나라에 넘겼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당사자인 대한제국이 배제된 채 맺어졌다. 따라서 통일 한국이 간도협약을 무효로 선언하고 다시 영토획정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뉴스메이커 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