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종식시킬 '금석문' 이야기

[신간] 한국역사연구회의 <고대로부터의 통신>'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정권에 불과하다며 중국 관변역사학자들이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겠다고 나서. 한.중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고구려인이 직접 쓴 역사서가 없다보니 중국사학자들이 나름대로 사서에 근거한 자료를 들이밀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고대사 학자들은 광개토왕릉비 등 고구려인이 직접 금속과 돌에 아로새긴 ‘금석문’(金石文)이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한다. 때마침 17명의 한국고대사 전공 소장 학자들이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금석문을 거의 망라해 소개하고 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의 10년 노하우를 일반인들과 공유하기 위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의 10년 노하우 결집

<고대로부터의 통신-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푸른역사 간)은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가 “당대의 사실을 말해주는 생생한 자료, 일종의 타임캡슐이자 ‘고대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생방송 녹음기’에 접근하게 해주는 안내서”라고 자부하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18편의 글 중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1~4세기 고구려 정치체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가 쓴 ‘고구려 건국설화가 모두루 무덤에 묻힌 까닭은’과 고구려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기환의 ‘1백년 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을 요약 소개한다.

이들 글을 함께 제시된 금석문의 탁본과 읽다보면 다른 나라들의 왜곡된 해석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박과 고구려인이 직접 기록한 고구려에 대한 인식 등을 알게 되고 다시금 금석문의 역사적 가치를 느끼게 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시작단계라 한다. 중국이 이미 수십년간 작업을 통해 티벳 역사를 완전히 자국역사로 왜곡 편입시킨 사실과 비교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우리나라의 고구려사 연구가 남북 공동으로 박차를 가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음은 여호규 교수와 임기환씨의 글의 요약이다.

고구려 건국설화가 모두루무덤에 묻힌 까닭은

고구려의 옛 도읍이었던 집안분지에는 지금도 1만여 기의 고분이 장대한 행렬을 이루고 있지만 주인의 명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부장품을 묻고 화려한 벽화를 그리면서 왜 주인공의 이름은 전하지 않았을까. 이유야 어떻든 이로 인해 무덤을 통해 고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집안분지의 무수한 무덤 사이를 헤매다 보면 딱 하나 주인 있는 무덤을 만날 수 있다. 1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짝을 이룬 무덤 두 기에는 염모묘와 모두루묘라는 팻말이 서 있다. 염모묘 팻말은 중국 정부가 오래 전에 붙인 듯 빛바랜 모습이고 모두루묘라는 팻말은 선명하다.

이 무덤은 1935년 9월 집안현 중학교 왕영린 교사가 무덤 안에 글씨가 있다고 제보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무덤의 역사성은 묵서 명문에 담겨 있다. 하나의 무덤에 팻 말이 두 개라. 그것도 한쪽은 빛바래고 다른 쪽은 선명한 대조적인 모습으로 무덤을 지키고 있다니. 묵서 명분은 널방으로 통하는 앞방의 정면 상단에 두루마리처럼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먹과 송곳으로 3센티미터 전후의 괘선을 네모반듯하게 긋고 행마다 열 자씩 빼곡히 써내려갔다. 무덤 벽면에 적었지만 야외의 석비를 옮겨 놓은 듯하다. 글자 수도 8백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1천7백55자인 ‘광개토왕릉비’를 제외하면 삼국시대 금석문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주인공의 생애를 담고 있을 본문의 8백여자 가운데 판독되는 명문은 3백여자 안팎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이 무덤의 주인공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란이 벌어졌다. 주인공과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역시 염모와 모두루이다. 그런데 두 사람 가운데 유독 모두루 앞에만 ‘노객’(奴客)이라는 비칭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중국 학자 라오깐은 모두루를 염모에게 예속된 가신을 파악하였다. 라오깐의 견해는 중국 학계에 받아들여져, 지금도 중국 정부의 공식 간행물인 ‘집안현 문물지’ 등에는 ‘염묘 묘지’로 소개되고 있다. ‘염모묘’라는 빛바랜 팻말이 서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묘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노객’이라는 비칭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왠지 불안하게 느껴진다. 염모는 15~39행, 곧 전반부에만 등장하며, 39행에 ‘수진’(壽盡), 곧 그의 죽음을 알리는 명문이 나온다.

반면 첫머리를 제외하면 모두루는 46행에 이르러 비로소 등장한다. 두 사람은 동시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시대에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한 행씩 따라가다 보면 ‘대대로 관은을 입었다’(世遭官恩)는 표현은 이들이 동일한 혈연 계보에 속하는 인물임을 일깨워 준다.

한편 39행의 ‘조대형염모’(祖大兄冉牟)라는 명문은 염모와 모두루가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를 두고 일본 학자들은 발견 당시부터 주인공을 모두루로 파악하고 첫머리 2행을 그의 제기(題記)로 보았다. ‘모두루묘’라는 선명한 팻말이 세워진 데에는 어떤 형태로든 일본 학자의 영향력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44~51행을 보면 모두루는 광개토왕대에 북북여 지방장관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왕의 죽음을 맞아 직접 조문하지 못함을 몹시 애통해 하였다. ‘노노객’(老奴客)이라는 표현은 모두루가 광개토왕을 이은 장수왕대에도 상당 기간 활동하였음을 시사한다.

묘지에 나타난 모두루의 생애는 이 무덤에 5세기 중반이라는 시간성을 부여한다. 또한 당시는 평양 천도 이후이므로 ‘국내성이 별도(別都)로 바뀐’ 역사의 공간선도 또렷이 부각된다. 이제 우리는 시공간성이 명확한 무덤을 하나 갖게 되었다.

모두루 묘지(墓誌)는 왕실의 건국설화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구절 역시 ‘천하 사방이 이 나라의 가장 성스러움을 알고 있을지니’라고 하여 고구려 국가의 성스러움을 기술하고 있다.

묘지에는 또 346년 선비족 전연의 북부여 침공을 물리친 염모의 전공, 그리고 그가 지킨 북부여 땅은 몰락 직전까지 내몰린 고구려를 중흥시킨 디딤돌이 되었다. 염모라는 위대한 영웅과 함께 북부여 땅은 제2 건국의 원천이 된 것이다. 묘지에서 시종일관 북부여를 거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시조의 출자지라는 상징성이 겹쳐지면서 북부여 땅은 더욱 신성한 땅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북부여’라는 명칭 앞 뒤에 ‘하백의 손자이고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탄생하신’ 신성한 곳임을 끊임 없이 되풀이하여 찬양한 이유는 이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추모성왕이 신성한 북부여에서 나왔다는 건국설화를 묘지 첫머리에 통째로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구려 왕실과 북북여 땅의 신성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모두루 가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텐데 말이다.(여호규)

1백년 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

고구려의 4백년 고도(故都) 국내성 (國內城). 지금은 중국 땅 길림성 집안시이다. 집안에 들어서는 문턱에서 처음 마주치는 감동은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우며 고구려 유적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장군총이다. 사실 집안에는 장군총보다 규모가 더 큰 무덤이 많다. 크기로만 따지면야 열 손가락 안에 겨우 들 정도지만, 직접 가서 보면 장군총은 본래 크기보다 훨씬 장대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완만한 구릉지대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우뚝 솟아 있기 때문일 터이다.

장군총 위에 올라서 멀리 집안 시가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길을 가까이 모아오며 고구려 왕릉 중 두 번째로 크다는 태왕릉이 눈에 들어오고 다시 그 앞에 ‘광개토왕릉비’가 서있다.

고구려 제19대 임금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 아들 장수왕이 414년(장수왕 3년)에 세운 비석이 그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서 있다.

태왕릉 부근에서는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원컨대 태왕의 무덤이 산악처럼 안전하고 튼튼하기를)이란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된 바 있다. 태왕릉이란 이름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광개토왕릉비 주변의 대형 고분이라곤 태왕릉과 장군총 둘 뿐이기 때문에 둘 중 하나가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최근 광개토왕을 지칭하는 好太王이라는 글자가 적힌 방울이 태왕릉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편집자 주).

사각기둥 모양의 광개토왕릉비는 몸돌의 높이만 6.39미터, 너비는 1.3~2.0미터로 윗면과 아랫면이 약간 넓고 허리 부분이 약간 좁은 형태다. 몸돌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돌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길이 3.35미터, 너비 2.7미터 크기의 네모진 모양으로 여기에 홈을 파서 비를 세웠다. 사실 몸돌의 무게만도 37톤에 이르기 때문에 여간 단단하게 지탱해주지 않으면 1천5백년 세월의 모진 비바람에도 우뚝 서서 굳건히 견뎌왔을 리가 없다.

몸돌 네 면에 총 44행 1천7백75자가 적혀 있다. 다만 1백50여자가 훼손되어 읽을 수가 없다. 세월의 풍상 때문이 아니라 근대에 탁본을 뜨기 위해 비문의 이끼를 태우다가 그랬다니...

현재 전해지는 우리 나라 문헌 중에 광개토왕릉비를 처음 언급한 문헌은 ‘용비어천가’(1445)이다. 이성계가 금나라의 비로 여긴 대목이 나온다. ·

17세기 들어 집안 일대에는 갑자기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차지하게 된 후 이곳을 시조의 탄생지라고 하여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이른바 봉금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런 봉금 정책은 2백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1876년에 봉금을 해제한 이후 1880년 무렵 한 농부가 비를 발견하면서 일부 탁본을 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됐다. 이때만 해도 이 비가 장차 두고두고 국제적인 논쟁거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72년 10월 이른바 ‘10월 유신’의 찬바람에 온 사회가 얼어붙어 있었을 때였다. 이때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씨의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란 책이 나와 온 나라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릉비를 변조하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변조의 전말은 이렇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중국에 파견한 사카오 중위가 일본에 유리하도록 25자를 변조한 일종의 가짜 탁본을 육군참모본부에 제출했다. 이렇게 왜곡된 가짜 탁본으로 연구한 내용을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했다.

그 사이 육군참모본부는 능비를 조사해 1899년 이전 어느 해에 사카오의 비문 변조를 은폐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발랐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모든 탁본이 그들이 석회질로 변조한 이후에 제작된 것이므로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후 1981년 왕건군이란 중국학자가 오랜 기간의 현지 조사 끝에 ‘好太王碑硏究’란 책을 발간했다. 그는 현지의 중국인 탁본공이 탁본을 쉽게 하기 위해 비문의 여기저기에 회칠을 하여 보강한 적은 있으나 비문 발견 초기부터 조직적인 비문 변조가 있었던 흔적은 없다고 하여 이진희의 육군참모본부 변조설을 정면 부정했다.

불확실한 탁본보다는 현지에서 비문을 직접 보면서 작성한 왕건군의 판독문은 비문 연구를 더욱 활성화시켰다. 다만 누구에 의해서든지 비문이 석회칠을 통하여 변조되었다면 비문의 본래 글자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사실 비가 알려진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가 나빠 단편적인 탁본이 유행했을 뿐이며 정교한 탁본은 1887년 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석회를 칠하여 비문이 변조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탁본을 원석(原石) 탁본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비문 연구의 주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원석 탁본 자체가 얼마 남아 있지 않고 또 과연 어느 것이 원석 탁본인지 새로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논란의 근원은 이른바 ‘신묘년’ 기사에 모아진다. 왜냐하면 그 문장에는 고구려와 백제.신라 그리고 왜가 맺고 있는 국제관계가 20자란 아주 짧은 문장에 담겨 있는데,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대 한.일 관계가 아주 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인ㄷ르의 자존심이 달린 ‘민족’과 ‘민족사’의 문제인 것이다.

단락을 어떻게 끊어 읽을 것인가, 보이지 않는 글자를 무슨 자로 볼 것인가, 위조된 글자의 존재를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몇가지로 나뉜다.

우선 변조설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신묘년 문장을 이렇게 판독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斤)羅以爲臣民

일제 시기에 일본 관학자들은 이 문장을 으레 이렇게 해석하였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斤)羅(가라.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렇게 볼 때 당연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 한편 위당 정인보 선생이 1930년 말에 일본의 주장을 비판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으나 공표하지는 못하였고 1955년에 비로소 발표하였다. 정인보는 신묘년 문장의 주어는 고구려인데, 주어가 생략된 것으로 보았다.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바다를 건너가 (왜를)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영락6년 병신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정인보는 당대 한학의 최고 대가였지만 민족애가 한학의 독법을 가로막은 것일까. 어딘지 궁색해 보인다. 어쨌든 앞의 두 견해는 모두 위의 판독문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이 제기된 이후에는 위의 판독문 자체를 부정하여 해석을 유보하거나 또는 새로운 판독에 입각한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를 주어로 하는 해석이든 혹은 새로운 판독에 따른 해석이든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그래서 기왕의 판독문을 인정하고 또 문장 해석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지만 이는 고구려 측에서 백제 정벌의 명분으로 내세우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는 견해도 나왔다.

즉 신묘년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 당대 고구려인의 비문의 필법에 따른 허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문을 당대 고구려인의 관념에서 접근하려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 하나가 ‘신민’이라는 개념이다. 신민의 주어가 고구려인지 왜인지를 비문 내에서 당대 고구려인의 필법으로 판가름하는 방법을 생각해 봄 직하다.

비문에는 일곱 건의 정벌 전투 기사가 서술되어 있지만, 그중 태왕의 은덕을 베푼 대상은 곧 과거에 속민이었다고 밝힌 국가 즉 백제.신라.동부여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신묘년 조의 신민은 곧 고구려 태왕의 신민일 수밖에 없다. 아직 판독의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신묘년 기사 전체의 해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비문에는 1천7백75자의 글자가 씌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겨우 20자에 불과한 문장을 놓고 얼마나 많은 논란이 지금껏 계속 되고 있는가.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틈만 나면 임나일본부설의 그림자 아래에서 광개토왕릉비를 해석하고 있고 우리는 우리대로 고구려의 영광과 왜의 미개함을 대비시키려고만 애쓰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중국까지 나서서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거두어들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천5백년 전 고구려인의 역사를 담은 광개토왕릉비가 현대 한.중.일 3국이 가담한 ‘역사만들기’의 증언자가 된 셈이다. 이제 고구려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탐욕을 거두어야 한다. (임기환)

(프레시안 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