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C가 외교를 망친다"

 

악몽이 현실로 다가왔다. 1백여년 전 대한제국 시대의 한반도 모습이 되풀이되는가. 일본·중국·러시아가 한반도에서 거만을 떨며 힘 자랑하던 시절. 그때의 장면들이 새로운 버전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흡수 기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독도 관련 발언은 예고편이다.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다루는 솜씨엔 노련미가 넘친다. 동북아 정세에 조그만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몇 백, 몇 천년 닦은 노하우다. 한·미동맹에 금가는 소리가 나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틈새를 파고들었다.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삼았다.

중국은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잃은 남북한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으려 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그어진 군사력의 제한선을 넘어버렸다.

중국 정부는 우리를 잘 안다. 노무현식 민족 자주 외교의 문제점을 꿰뚫어 보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생떼 공세를 달래서 무마하는 게 盧정권의 해법이다. 한·미동맹의 역사적 업적은 깔아뭉개고 미국과의 협조는 사대주의라며 멀리한다. 노무현 외교의 중심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사무처다. 그렇다면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기댈 곳은 중국밖에 없다. 중국은 이 점을 알고 활용했다. 6자회담 성사와 진행의 중심은 중국이다. 중국 정부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시민단체에서 고구려사를 지키자고 결의한들 중국은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다. 우리 정부가 북핵 문제로 중국에 신세를 진 탓이다. 앞으로도 6자회담이 잘 되게끔 해달라고 중국에 매달려야 한다. 민족자주를 자기네 독점물인 양 떠들어온 盧정권 핵심인사들이 고구려사 지키기에 소극적인 것은 중국한테 약점이 잡혀서다.

일본도 노무현 외교의 허점에 밝다. 한·미동맹이 삐거덕거릴수록 미국의 대안은 자기뿐이라는 점에 일본은 쾌재를 부른다. 한·미동맹이 단단했던 시절엔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미국은 못마땅해 했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은 일본·호주와의 3각동맹을 다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중국 포위망이다. 한 세기 전 일본이 동북아의 승자가 된 기반은 영·일동맹이다. 일본은 동맹이란 거래가 얼마만큼 이윤이 남는 외교 장사인지를 잘 안다.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는 일본의 주장은 때가 되면 하는 소리다. 맞대응할 이유가 없다. 국제사법재판소로 독도 문제를 끌고 가려는 물귀신 작전에 말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군사력이 부쩍 커진 뒤에 나온 발언이어서 찜찜하다. 한·미동맹이 금간 상황에서 일본 견제는 우리 힘으로 해야 한다. 미국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그럴 만한 독자적인 힘과 외교적 지혜가 우리에게 없는 게 걱정이다.

외교부 직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노무현 외교를 비판했대서다. 그러나 "NSC가 노무현 외교를 망친다"는 지적은 정확하다. 한·미동맹을 적극 활용하자는 외교부의 주장에도 민족 자주의 정신이 깔려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 전략적 차원에서 용미를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NSC의 핵심인사들은 자기네만이 민족 자주의 숭고함을 기리는 양 착각하는 게 아닌가. 그들의 외교는 골목 안에서 남북 민족이 잘해보자는 수준이다. 골목 밖에서 몰아치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파고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에서 중국과 일본이 기세를 올리는 것은 그런 단선적 외교 때문일 수 있다.

외교부 직원들의 비판은 고언(苦言)이다. 괘씸죄로만 다스릴 일인가. 盧대통령은 NSC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쇄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노무현 외교가 바로서기 위한 출발점이다.

(중앙일보 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