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토된 태왕릉 청동방울 銘文 의미

"신묘년 정복자는 倭 아닌 고구려"

신라와 백제 굴복시킨 기념으로 만든듯
"호태왕=광개토대왕" 무덤주인 논란 종식
임나일본부설 뒤집은 결정적인 증거로


조법종 교수가 그림으로 설명한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의 모양과 명문. 지안 박물관이 촬영을 막아 사진은 찍지 못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태왕릉(太王陵)에서 ‘신묘년’(辛卯年)과 ‘호태왕’(好太王)이 함께 적힌 청동방울이 발견된 것은 무덤 주인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물론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증거 자료가 확보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 유적은 중국이 지안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 뒤 실사에 대비해 대대적 발굴ㆍ정비 사업을 벌인 지난해 5월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에 따르면 지안박물관 직원은 “이 청동방울을 태왕릉 동쪽 봉분 석축부분에서 찾아냈으며 원래 석실 내에 있던 것을 도굴한 뒤 나중에 가져가려고 잠시 묻어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방울은 높이가 6㎝ 정도, 위 지름이 2.5㎝, 아래 지름이 3㎝ 정도인 원통형 종 모양”이라며 “특별한 장식 문양은 없고 ‘신묘년호태왕(무)조(령)구십육(辛卯年好太王(巫)造(鈴)九十六ㆍ( )는 중국학자의 주장)’이라는 한자가 세자씩 사방에 음각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글자는 1㎝가 안 되는 크기이며 광개토대왕 비문 서체와 유사하다”고 덧붙였다.

중국학자들은 태왕릉 주변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큰 바위처럼 단단하기를 비나이다(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고 새겨진 벽돌이 발견된 데다 광개토대왕 비에서 서남쪽으로 불과 200㎙밖에 떨어지지 않은 왕릉급 무덤이라는 이유로 일찌감치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 비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비가 태왕릉 뒷편에 놓인 데다, 태왕이라는 이름은 광개토대왕 말고도 여러 왕에게 쓴 것이어서 확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보여왔다.

‘신묘년에 호태왕의 무당이 만든 96번째 방울’로 풀이할 수 있는 명문의 내용은 광개토대왕 비의 신묘년조 해석을 놓고 벌어진 논란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켰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 교수는 “고대사회에서 무당의 방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신묘년에 이것을 만들었다는 데서 그 해에 기념할 만한 중요한 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신묘년의 중요한 일을 광개토대왕 비문과 관련해 해석하면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킨 것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광개토대왕 비문의 신묘년조(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ㆍ○는 알 수 없는 글자)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온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위당 정인보 선생이나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 손영종 등 고구려를 주어로 삼아 이 비문을 해석한 학자들은 고구려가 그 해에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켰다고 해석했다.

조 교수를 비롯해 공석구(한밭대) 박경철(강남대) 교수 등 지난해 말 지안 답사에 참가한 학자들은 2월 초 고대사학회 월례 발표회에서 새로 확인한 고구려 유물 자료와 중국의 동북공정 최근 현황을 설명할 계획이다.

(한국일보 2004-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