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차기 세계패권"

'팍스 시니카' 되살리고 있다
"사회주의 공터를 민족주의로 메꿔 불안한 통치 막아"

1949년 장졔스(蔣介石) 국민당군이 마오쩌둥(毛澤東) 홍군(紅軍)에 패해 타이완으로 퇴각할 당시 마지막 퇴로가 바로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이었다. 이 곳은 그 해 10월 24일 인민해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타이완 진먼다오(金門島)와 불과 십여㎞ 떨어져 있다.

인민해방군은 1958년 8월 진먼다오에 47만4900여 발의 포를 발사하며 재차 상륙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유명한 ‘8·23포격전’으로 타이완 군 재건의 기폭제가 된 전투였다.

양안 분단의 최전선 샤먼. 아직 휴전상태임을 분명히 하려는 듯, 섬 전체를 감싸는 환다오루(環島路) 한 켠에 타이완을 향해 붉은 색 대형간판들이 서 있다. ‘一國兩制 祖國統一(일국양제 조국통일)’. 구호는 양안 통일의 열망과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고 있다.

샤먼항에서는 매일 12대의 유람선이 수 천 명의 중국인들을 싣고 진먼다오 유료 일주관광을 한다. ‘160㎞ 해협 건너 타이완 땅과 진먼다오는 중국의 일부’임을 주지시키려는 교육 의도가 완연하다. 유람선이 항구를 출발하더니 얼마안가 인근 ‘구랑위(鼓浪嶼)’ 정청궁(鄭成功) 동상 앞에서 잠시 속도를 늦춘다. 명조(明朝) 때 타이완을 정복했다는 장군으로, 중국이 타이완 영토권을 강조할 때마다 내미는 중화 민족주의의 증거물이다.

30여분을 달린 유람선은 놀랍게도 진먼다오 20~30m 앞까지 바짝 다가선다. 타이완 군 벙커가 눈앞에 버티고있고, 타이완 백일청천기(白日靑天旗)가 펄럭이는데도 아랑곳 않는다. “우리가 통일하자는데 타이완은 왜 반대하는가? 같은 중화민족 아닌가?” 망원경을 휴대한 랴오닝(遼寧)성 출신 60대 천원시(陳文錫)씨 얘기다. 가이드도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가 인도주의 관점에서 (진먼다오에) 물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 끊으면 금방 항복할 걸요?”

올해는 중국의 개혁·개방 26년째. 대학생들 의식도 꽤 변했다. 그들에게 ‘홍위병?’하고 물으면 ‘지나간 과오’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민족문제때문일까? 타이완문제는 예외였다. 샤먼(厦門)대 이공계 모 기숙사에서 만난 5명의 대학생들은 “(타이완이)독립하려고 하면 즉각 쳐들어 가야 한다”며 ‘전쟁 불사론’을 외쳤다. 조선족 K학생은 “중국인들로부터 ‘너는 중국인(한족)이 아니고 공민증(公民證) 가진 조선족’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언짢아 한다.

아시아 스타의 성공방정식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동남아 화교가, 타이완에서 스타로 포장된 후 중국으로 진출하면 ‘아시아 수퍼스타’가 된다는 얘기다. 싱가포르 가수 쑨옌즈(孫燕姿)가 대표 케이스다. 젊은이들끼리도 한족, 중국인의 피를 의식하고있다는 얘기다. 중국 네티즌들이 중화민족주의 정서에 쉽게 흥분하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지난 9월 광둥성 주하이(珠海) 일본인 집단매춘 사건, 지난 8월 헤이룽장(黑龍江) 8·4 일본 생화학 무기가스 누출 사건에 대한 분노,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팀이 선전하자 ‘심판 불공정판정’ 등의 이유로 한국팀을 매도한 것 모두가 네티즌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젊은 층들은 서구문화를 좇기도 하지만 여전히 “중화민족은 다르다”는 강한 민족의식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국적과 피’를 따지는 중국 젊은이들. 정서와 감정에 쉽게 무너지는 네티즌들. WTO가입과 외자유치, 개혁·개방을 외치는 중국의 겉 모습 하고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개혁·개방 26년째, 중화(中華)민족주의는 분명 부활하고 있다. 중국(中國)은 ‘세계의 중심 국가’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새벽 6시 국영중앙TV(CCTV)의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공산당과 함께 미래 신중국을 건설하자”라는 우렁찬 노래를 들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베이징(北京)대 후자오량(胡兆量)교수는 “홍콩의 반환은 중국 민족 자강(自强)의 끊임없는 정신의 발현”이라고 평가한다. 홍콩인들은 지난 1997년 영국인(British Hong Kong)에서 중국인(Chinese Hong Kong)으로 국적이 바뀌었다. 이후 6년이 흘렀다. 150여년 통치의 대영(大英)제국 체취는 급격히 사라지고, 중화민족주의 체취가 흠뻑 묻어나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 대만 동포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최초의 중국인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가 우주상공에서 한 말이다. 홍콩을 한번도 찾지 않았던 그다. 중화민족주의 의식의 발로가 아니면 중국 정부의 사전 기획,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중국인 우주영웅 양리웨이’ 드라마의 임팩트(衝擊)는 그러나 강렬했다. 그가 전한 안부는 홍콩 마카오 대만인들 상당수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민족주의 의식 고취는 계속 이어졌다. 양리웨이는 지구 귀환 후 보름째인 10월31일 홍콩 마카오를 찾았다. 4개월 전 50여만 명이 나선 홍콩민주화 시위에 놀란 중국정부가 그를 ‘중화민족주의 전도사’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는 1주일간 홍콩 마카오에 머물며 ‘중국, 중국인’을 심었다. ‘홍콩인들에게 국가민족 동질감, 자부심을 심어줬다’는 자유당 톈베이쥔(田北俊)주석의 소감처럼 흥행은 성공했다. 오성홍기(五星紅旗)에 찍힌 우주 훈련복을 남기고 가자 어린이들은 환호했고, 어느 새 그들의 희망은 ‘중국 우주인’으로 바뀌어 졌다.

선저우(神舟) 5호 발사 성공 때 홍콩 번화가는 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홍콩의 명동 ‘코즈웨이 베이’ 타임스퀘어(時代廣場)에는 발사 성공과 동시에 ‘선저우 5호, 중국인의 자랑(驕傲)!’ 현수막에 오성홍기가 펄럭였다. 신문들도 붉은 빛이었다. ‘중국인 마침내 날았다’, ‘중화 천 년의 꿈 실현’…. 이후 홍콩의 ‘반(反)중국’ 목소리는 어느 새 자취를 감췄다.

홍콩 스탠다드 차터드 은행 대중화(大中華)지역 담당 왕동셩(王冬勝)총재는 ‘홍콩인의 현주소’를 “홍콩의 마음, 중국인의 감정을 갖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일 것(香港心 中國情 國際觀)”이라고 요약한다. 요즘 홍콩에서는 중등학교에서 모국어(廣東話)를 접고, 베이징 중국어(普通話)를 정식 교과과목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문화학자 샤먼대 이중텐(易中天)교수는 선저우(神舟) 5호 우주발사 성공을 보면서 1970년 둥팡훙(東方紅) 1호 인공위성 발사 때를 떠올렸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 참 어려웠어요. 중국이 인공위성을 첫 발사했을 때 모두 길거리로 동원돼 충성을 맹세했지요.” 그는 “정부가 양리웨이를 민족주의 의식의 돌파구로 활용하는 느낌이다”고 말했다.

중화민족주의가 새삼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이완 국민당 국가정책연구기금회 쑤치(蘇起) 소집인(召集人)은 “위험한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면서 “중국 정부가 무너져 가는 사회주의 공터에 의도적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세우고 있고, 불안한 통치를 위해 민족주의를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린비자오(林碧炤) 국제관계연구센터 주임교수는 “중국은 민족주의 의식의 불을 당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서 “수 년 전 미국의 동유럽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誤暴) 때 드러난 중국인들의 반미(反美)정서를 돌이켜 보면 그 무서움을 알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신 패권’의 저자 스티븐 모셔는 “중국인은 과거 우월한 중화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면서 “헤게모니( 主)의 야심과 강렬한 민족주의를 발휘,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주도의 세계평화)시대 이후 차기 세계 패권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 팍스 시니카(Sinica·중국중심의 세계)의 정신이 되살아 나고 있다.

(조선일보 20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