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도 중화민족" 뿌리깊은 패권의식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왜곡, 편입시키려고 해 한중 양국간에 갈등이 야기되고 있으며 자칫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예고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12월 27일~30일 3박4일 일정으로 고구려연구회 답사팀과 함께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집안과 환인을 현지취재하고 돌아왔다. 취재진은 현지에서 중국이 고구려사를 편입하기 위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등 현지사정과 우리측의 대책 등을 듣고 이를 3회에 걸쳐 긴급기획물로 내보낸다. 이번 기사는 그 두번째 이다....편집자 주)

▲ 주변 민가를 헐어내고 말끔하게 새로 단장한 국내성 서벽.
ⓒ2004 서길수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기 위한 '동북공정'은 2년전 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고,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상황에서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좌절로 국내에서 큰 관심을 끌게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인들의 심리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역사의식이 문제다. 이런 중화중심주의는 중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패권주의적' 형태로 표출될 것임을 여러 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경고했다.

10년 전 베이징에서 만난 한 인민대학 학생에게 "지금 중국 영토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지 않느냐"고 가볍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정색을 하고 "원나라 때 중국 영토가 가장 넓었다. 그 때는 지금의 동유럽 일부와 러시아까지도 중국 영토였다"고 말했다. 징기스칸도 중화민족이라는 말이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인데 이해할 수 없다"라고 되묻자 그는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다. 몽골족은 중화민족의 하나다"라고 목소리를 높혔다. 몽골 공화국이 지금도 중국 북쪽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지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유라시아 대륙 거의 전체가 중국 영토가 된다.

기자는 정면으로 반박했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란

중국 정부는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고 주장한다. 중국 역사는 한족을 비롯한 56개의 민족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항상 한족을 중심으로 한 다수 민족이 '통일'(大一統)을 견지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시각과 함께 한다.

즉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 전역을 통일했으며 지금 중국의 광서성, 운남성 등의 각종 소수민족도 모두 통일된 진나라의 영역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진 나라가 망한 뒤 한나라 때 서역(현재의 신쟝위구르자치구)의 각 민족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이들이 화하(華夏)민족이라는 칭호로 불려지는 등 세계 역사상 인구수가 가장 많은 한족이 성립됐다.

이후 한족이 세운 정권도 있고 원나라나 청나라 등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도 있지만 진나라 한나라 때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는 틀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대일통(大一統)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즉 지금부터 2000년 전인 진나라와 한나라 때 이미 '통일적 다민족 국가'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런 '통일적 다민족 국가'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한 실례로 근대 중국을 연 '신해혁명'만 해도 그 구호가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흥하게 하자'였다. 따라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위구르족, 티벳족, 몽골족, 조선족은 물론 대만의 독립까지 막으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원나라 때 전 국민을 4등급으로 나눴다. 1등급은 몽골인, 2등급은 색목인(色目人·서역 사람들), 3등급은 거란·여진족들, 4등급은 남인(南人)이라고 불린 남송(南宋)의 한족(漢族)들이었다. 몽골인들은 당시 전체 인구의 대부분(80% 이상)인 한족들을 노예로 취급하다시피 했는데 원나라가 중화민족 왕조라니 이해가 안된다"그 친구는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징기스칸도 중화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고구려가 '동북 변경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는 것은 아무 문제없이 자리잡을 수 있다.

통화사범대 겅티에화 교수가 1994년 펴낸 <호태왕비 신고(新考)>라는 책은 이미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옛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삼황오제 시절의 고양씨의 제곡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 학자라는 사람이 전설에 불과한 삼황오제 시절의 얘기를 끌어내 고구려의 선조가 중국인라고 강변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주도해 편찬한 <중국 역사지도집>에는 조조의 위나라의 영토가 황해도, 평안남도와 함경남도까지, 당나라 때 영토는 대동강 이북 전부로 표기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비가 아니라 호태왕비?

지난달 28일 고구려연구회 답사팀과 함께 광개토태왕비를 찾았다. 이 비석 하나에서도 중국인들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여러개 찾을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이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太王)이다. 고구려인들은 자신의 왕을 '태왕'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대왕'으로 부르는 것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다"라고 설명했다. 중국에서는 최고위 군주를 황제, 일본은 천황이라고 불렀다면 고구려인들은 '태왕'이라고 불렀음을 여러 고구려 금석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를 보호하고 있는 누각에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적혀 있다. 광개토왕의 정식 명칭은 '광개토경국강상평안호태왕'(廣開土境國崗上平安好太王)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절대 '영토를 넓혔다'는 뜻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광개토왕'이라는 쓰지않는다. 반드시 '호태왕'이라고 부른다.

대리석에 새겨진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설명문은 "이 비는 호태왕의 아들인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진 의희(晋 義熙) 10년(414년)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의희'는 동진(東晋) 안제(安帝) 때의 연호다. 동진은 원래 한족 왕조였던 서진이 흉노족에게 멸망당한 뒤 강남으로 도망가 세운 왕조다.

광개토태왕비에 새겨진 1775개의 글자 가운데는 분명 '영락'(永樂)이라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가 있다. 다른 금석문을 통해 고구려가 건흥(建興), 연수(延壽), 연가(延嘉), 태화(太和), 영강(永康) 등의 연호를 사용했음이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왕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天帝之子)로 인식했음도 상식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진 연대를 굳이 중국 왕조의 연호로 표기해놓았다. 고구려의 독자성을 숨기고 '지방정권'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북방 이민족이 세운 북위(北魏) 등의 연호가 아니라 한족 왕조인 동진의 연호로 표기했다.

중국의 주장대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면 소수민족이 세운 왕조의 독자성도 공평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한족 중심의 왕조에 소수민족 정권이 복속되었다는 의미에서의 통일성만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통일적 다민족 국가'란 결국은 '한족 중심주의, 중화 패권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 지난해 12월29일 집안(集安)에서 환인(桓仁)으로 가는 도중에 발견한 고상식 창고. 고구려시대 식량 등을 저장하는 고상식 창고 '부경'이 바로 이것이다.
ⓒ2004 김태경
"북한에 대한 연고권 주장할 수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일부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대응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학술적으로만 대처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넘어가면 이는 단지 고구려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발해는 물론 고조선까지 중국사로 넘어간다.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룬 종족이 예맥(濊貊)족과 한(韓)족 가운데 절반인 예맥족의 역사가, 우리 역사 활동무대의 절반이 민족사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는 한국사의 근간이 흔들리는 심각한 문제다.

최광식 고려대 박물관장은 지난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학술 발표회'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우고 특히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운남성 등 국경지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에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고 역사와 관련되 발언을 했을 때 매우 긴장했다.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몰려가고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넘어오고, 2001년 한국 국회에서 재중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는 등의 상황이 발생하자 중국 당국은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함으로써, 유사시에는 지금의 북한 땅에 대한 연고권까지 내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외국어대 여호규 교수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중국의 최근 행보를 읽어보면 동북지역뿐 아니라 북한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까지 주장하려고 한다. 이는 북한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중국이 개입하는 역사적 명분이 될 수 있다. 동북공정은 남북통일 이후의 국경 분쟁이나 북한의 위기 상황 등 현실적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정부의 한 관계자도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편입시키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 유사시 북한이 문제가 생기면 이곳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959년 중국이 티벳을 침공할 때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이런 우려는 단순한 기우로만 치부할 수 없다.

▲ 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하기 전에 선양에 만들었던 궁전. 불과 300만명의 만주족이 인구 1억5000만명의 한족을 260여년 통치했었다.
ⓒ2004 김태경
소수민족에 대한 알레르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중국인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알레르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중국 전 역사를 보면 소수민족이 한족을 지배한 것이 3분의 1을 넘는다"며 "이 때문에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 역사는 5호16국,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소수의 북망 이민족이 끊임없이 한족을 지배했다. 당나라 때는 티벳족(당시 토번)에 의해 수도 장안이 점령되기도 했다.

가까운 역사에서도 이를 찾아 볼 수 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644년 베이징을 함락시켰을 때 그들의 인구는 300만명에 병사수는 16만~20만명에 불과했다. 당시 한족의 인구는 1억5000만명(1850년대는 4억3000만명) 정도였다. 인구 300만의 만주족이 100배가 넘는 한족을 267년간이나 지배했던 것이다.

중국망(www.china.org.cn)에 올라있는 <중국정부백서>에 의하면 지난 1995년 중국 전체 인구는 12억778만명이다. 이 가운데 한족은 10억9932만명, 55개 소수민족은 1억846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8.98%다.

1998년 당시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 등 모두 155개의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중국 전체면적 960만평방킬로미터의 64%에 이른다. 즉 중국 전체 인구의 10%도 안되는 소수민족 집중거주지역이 중국 전체 면적의 3분의2나 된다.

소수민족 집중 거주 지역은 모두 다른 나라와 국경지대로 중국 안보상 중요하며, 석유, 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들 지역을 한족 왕조가 확실하게 장악한 적이 거의 없다. 한족 왕조의 세력이 아주 강성할 때는 이들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지만 대개 단기간에 불과했다. 대부분 소수민족들이 지배했던 것이다.

중국의 북쪽에는 내몽고자치구, 서쪽에는 신쟝위구르자치구와 티벳, 남쪽에는 소수민족이 많은 윈난성과 광서장족자치구 등이 있다. 1755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준가리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신쟝위구르자치구가 청나라의 영토가 됐다.

티벳의 경우는 티벳인들은 단 한번도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대등한 관계'였다고 본다. 지난 1959년 중국의 공격으로 달라이라마 14세가 인도의 다름살라로 망명해 지금까지 독립정권으로 자부하고 있다.

만주로 알려진 랴오닝·지린·헤이룽장의 동북 3성의 사정도 비슷하다. 동북 3성은 이곳에서 흥기한 만주족이 중원을 점령하면서 현재의 중국 영역에 들어갔다. 더구나 만주족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호하고 유사시 한족에게 왕조가 멸망당한 뒤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1860년대까지 200년이 넘게 만주지역에 한족들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한족의 이주가 금지되었던 동북 3성의 1812년 인구는 170만이었다. 30년 뒤에는 300만을 넘었고 봉금정책이 풀린 1897년에도 700만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7년에는 1억697만명이나 됐다. 100년간 1억 명이 늘어난 것은 산둥성의 기근으로 한족들이 엄청나게 이주하고 이들의 높은 출생률 때문이었다.

즉 만주지역이 한족들의 확실한 거주지가 된 것은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주요 종족은 조선족 192만명, 만주족 982만명, 묘족 7398만명, 장족(壯族·광서장족자치구), 위구르족 721만명, 티벳 459만명, 몽골족 481만명, 회족(回族) 860만명 등이다. 인구가 불과 4245명에 불과한 헤이룽장성에 주로 거주하는 허저(赫哲)족이라는 소수민족도 있다.

이 민족 가운데 중국 밖에 모국이 있고 어느 정도 힘이 있는 나라가 조선족밖에 없다. 중국은 거꾸로 남북 통일 뒤 통일 한국이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현재 인구 1억2000만명인 동북 3성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꺼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없이 소수민족에게 점령당했던 중국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그들에게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세계문화 유산 신청은 정치적

중국이 중국이 집안(集安)과 환인(桓仁)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을 한 의도부터 대단히 정치적이다.

북한이 지난 2002년 1월 고구려 고분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자국 안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은 세계문화유산을 이미 29개나 보유하고 있지만 길림·요녕·흑룡강성 등 동북 지방 것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북한이 등재를 신청하자 중국은 태도를 바꿨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마당에 북한의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전 세계적으로 '고구려사=한국사'로 인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2년 북한에 고구려 유적을 공동 등재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바로 '고구려 수도 , 왕릉과 귀족무덤'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제출했고 2003년 1월 세계유산 등재를 정식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4~10일 이코모스(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 현지 실사를 받았다. 이를 위해 올해 초 불과 6개월동안 3억위안(480억원 정도) 이상의 돈을 들여 집안과 환인의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북한이 고구려 고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을 하지 않았으면 중국도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6년 장천 1호분 벽화가 도난당했지만 중국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완벽한 모습이었던 국내성은 1990년 높이가 3m 정도로 낮아졌고 1997년에는 아파트 화단으로 변했다.

이렇게 고구려 유적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돈을 댈테니 보수를 하자고 말했지만 중국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그런 중국이 이제와서 집안과 환인의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것은 그들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올해 6월 중국 쑤저우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유적의 세계유산 등재여부가 결정된다.

만일 이때 북한과 중국이 신청한 것이 똑같이 받아들여진다면? 이 경우도 중국에게 훨씬 유리하다. 북한이 신청한 것은 벽화고분 16기를 포함한 고구려 무덤 63기가 전부다. 그러나 중국은 왕릉급 13기, 귀족무덤 26기 등 모두 40기를 신청해 수적으로 부족하지만 내용상으로는 결코 기울지 않는다. 또 중국은 북한과 똑같이 16기의 벽화고분을 리스트에 넣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홀본성, 국내성, 환도산성 같은 도시 자체를 신청했고 동아시아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리는 광개토태왕비도 신청했다. 이는 중요한 고구려 유적은 모두 중국에 있고 북한에는 무덤떼만 남아있는 것으로 오인될 만큼 큰 차이가 난다. / 김태경 기자

(오마이뉴스 2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