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는 어떤 법이 있었나요?

소수림왕 '율령'반포…철저한 집행·엄격한

길에 떨어진 물건도 함부로 줍지 않는 고구려인

어린이 여러분은 법 없이 살 수 있나요? 만약 세상에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단 하루도 살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당시 고조선에도 8 조로 된 법이 있었는데, 후기에 와서 점차 지켜야 할 법 내용이 많아져 60여 항목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법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지금부터 고구려에는 어떤 법이 있었는지, 고구려에서 법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나라들은 속고 속이며,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 기록한 역사책에서는 고구려는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놀라운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길거리에 떨어진 것도 함부로 줍지 않았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워낙 착했기 때문일까요?

소와 말도 함부로 죽이면 노비로 만들어

그보다는 법을 위반하면 처벌이 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와 수시로 싸워야 했던 민족이었던 만큼, 배신자가 생긴다면 국가의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나라와 왕을 배반한 사람은 먼저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의 전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또 도둑질한 사람은 그 물건의 10 배를 갚도록 했습니다. 만약 그것을 갚을 수 없다면 그와 그의 자식들을 기어이 노비로 삼아서 보상하게 했답니다.

고구려에서는 또한 소와 말을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소와 말을 함부로 죽이면 그 사람을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소는 농사 짓는 데, 말은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한 나라가 되려면 소와 말이 많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듯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범죄자가 생기면 부족의 지도자들이 회의를 통해 사형을 시키고, 부인과 자식들은 전부 노예로 삼았습니다.

알다시피 사회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히면 사람들의 냉대를 받아 살아가기가 힘겨워집니다. 당시 을불이 관가에서 벌을 받은 후 다시는 장사도 못 하고, 거지처럼 살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소수림왕 때 국가 공식법 ‘율령’반포

부족별로 관습처럼 법을 집행하거나, 수시로 만든 법을 기준으로 집행해 오던 고구려는 373년 소수림왕이 이를 정비해 율령(국가의 공식적인 법)을 반포하기에 이릅니다.

법이란 단순히 형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여러 가지 기준도 포함됩니다. 즉, 관청의 조직은 어떻게 만들고, 물건의 크기를 재는 도량형은 어떤지 등 사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다 법으로 정해질 수가 있습니다.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함에 따라 각 지방별로 달리 집행되던 법의 집행이 통일되었습니다. 같은 죄를 지었는데, 누구는 가벼운 벌을 받고 누구는 중형을 받는 일이 사라진 것이지요. 또 물건의 크기와 무게를 재는 도량형도 통일돼 물건을 거래할 때 보다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국가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일을 시키는 요역(徭役)도 보다 체계적으로 집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관리들의 높고 낮음과 봉급을 주는 것, 각자 맡은 업무도 명확하게 규정되어 보다 책임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국가적인 행사의 절차와 의미 등에 대해서도 하나의 기준이 생겨 전국적으로 같은 행사도 치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도 줄어들었습니다.

광개토대왕 무덤 비문에서도 세세한 법 규정 있어

소수림왕의 조카인 광개토대왕의 무덤의 비문을 보면 전체의 1/3이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법 규정입니다. 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잡아 온 한인과 예인 220 호만으로 자신의 무덤을 지키라고 명령했는데, 비를 세운 장수왕은 한인과 예인이 무덤을 관리하는 예법을 잘 모를 것을 걱정해 경험 있는 110 호를 더 데려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처럼 묘를 지키고 청소하고, 수시로 제사 지내는 일은 다양한 절차와 격식이 규정되어 있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릉비에는 또 수묘인을 배출할 지역과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고, 법령을 위반할 경우에는 형벌을 내리겠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법은 신라에도 큰 영향을 줬습니다.

신라가 만든 단양적성비, 울진봉평비 등에도 각?법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철저히 법에 의해 집행되고 관리되는 나라였습니다.

과거와 달리 대충 감으로 일이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에 의해 일 처리가 진행되었던 만큼 고구려의 국력도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소수림왕의 율령 반포가 고구려 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용만 /  고구려역사 문화연구소장>

(소년한국 2004-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