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갖고 있었을까요?

평안남도 평원군 원오리 절터에서 나온 흙 부처. 미소
띤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 곱게 주름진 옷 등 입체감
이 두드러진 조각품이다.

해마다 10월에 동맹 축제 열어

고구려 사람은 어떤 종교를 믿었을까요?

당시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전혀 전파되지 않았고, 372년 소수림왕이 비로소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 최고의 신인 천신을 비롯해 고등신ㆍ부여신ㆍ해와 달의 신ㆍ별신ㆍ조상신ㆍ농사의 신ㆍ불의 신 등을 믿었습니다.

고등신은 나라를 세운 추모왕이며, 부여신은 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특히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 축제를 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의식은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굴에서 수신을 맞이해 강가로 모셔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해모수가 변신한 태양의 빛을 받아 유화 부인이 추모왕을 탄생시킨 것의 재현입니다.

고구려는 왕이 직접 주관하는 이 행사를 통해 고구려가 신의 후손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날 왕과 귀족들은 비단에 수놓은 의복과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식장에 나오며, 행사 후에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화합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고유 종교를 받들었던 장소마다 추모왕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수신을 맞이한 동굴과 여러 신을 모신 신전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특히 국내성 지역의 동대자 유적은 고구려 고유 종교의 신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답니다.

각 지방마다 서로 다른 신 섬겨

고구려인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도 자주 지냈습니다. 특히 무덤은 제사가 행해지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다고 믿었으며, 조상이 후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무덤을 잘 만들고 오래오래 보존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의 삶을 갈망했고, 이러한 믿음은 고분 벽화 등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것은 때로 중국의 도교와도 비슷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고유 종교는 교단의 조직과 교리가 체계적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방이나 부족마다 서로 다른 신들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소수림왕 때 불교를 종교로 인정

고구려 종교의 이런 문제점을 안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불교는 교리 체계가 합리적이고 교단 조직도 갖추고 있었으며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서서히 전해져 고구려인의 정서에 이미 친숙해져 있었습니다.

소수림왕이 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전진이란 나라에서 순도 스님이 불상과 경전을 전한 때부터였습니다.

장천1호분에 그려진 그림. 후손들이 죽은 무덤 주인을 향해 절하고
있다. 가운데 주인공이 앉은 좌대에는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는 부처
가 지키고 있다.

그로부터 3 년 후 소수림왕은 소문사와 이불란사라는 절을 짓고 순도ㆍ아도 스님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이 적극 불교를 높이 받들고,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사찰 9 개를 만드는 등 불교를 적극 보호함에 따라 번창했습니다.

고구려의 스님들은 또 해외로 나가 널리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일본의 법륭사 금당 벽화를 남긴 유명한 화가인 담징도 당시의 스님이었습니다.

특히 혜량 스님은 신라로 건너 가서 신라 불교의 지도자인 국통에 올라 팔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국력 향상과 한국 종교 발전의 계기돼

고구려 왕들이 불교를 적극 지원한 것은 불교가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불교는 국가에 대항 충성을 강조하는 호국 불교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지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불교 유적으로는 정릉사ㆍ금강사 등의 절터, 신묘명금동아미타여래상, 원오리 흙부처,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등입니다.

특히 장천1호분 벽화에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불교는 신라와 비교해 보면 크게 발전하지 못 했습니다.

고구려 고유 종교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장천1호분 벽화의 그림처럼 조상신 숭배와 부처님 신앙이 서로 공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종교 발전에 계기가 되었고, 고구려의 국력 정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국원왕 때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광개토대왕 시기에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도 소수림왕 때에 이뤄진 법과 교육 그리고 종교 이렇게 세 분야의 큰 변화와 개혁 때문입니다.

<김용만 /  고구려역사 문화연구소장>

(소년한국 200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