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규 교수 `中 고문헌에 나타난 東北觀`

中사서들 "삼국은 삼한"…고구려 연고권 뺏으려해

중국이 고구려를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는 중국의 전통적인 중화사상과 천하관(天下觀)에 입각한 역사관을 계승하는 뿌리 깊은 편견의 발로라는 의견이 제기됐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이성규(李成珪) 교수는 15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주최로 정문연 대강당에서 열린 ‘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 연구의 방향’ 학술대회 발표 논문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동북관(東北觀)’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교수의 발표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한국사의 시각이 아니라 중국사의 시각에서 돌아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 ‘동이(東夷)’는 왜 높게 평가됐나?

고조선의 ‘8조법금’을 기록한 ‘한서(漢書)’ 지리지는 “도적질을 하지 않아 문을 닫는 일이 없었다”는 식의 미풍양속을 전하고 있다. 이후에도 ‘문명화된 동이’는 높게 평가된다. 중국 왕조는 ‘동이’의 세계가 발달된 토착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중원 문화를 수입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 지역에서도 중국식의 ‘직접적인 군현 지배’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동이’의 문명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예교화된 동이가 중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동이’의 주민들은 중국 군현을 축출하며 독자의 국가를 형성해 갔으므로 새로운 통제 방식이 필요했다.

◆ ‘기자조선’의 조작과 ‘삼한=삼국’론

‘동이’에 교화가 발달했다는 사실엔 논리적 연결고리가 필요했고, 중국측은 은(殷)나라의 현인이었다는 기자(箕子)를 그 교화의 주체로 설정했다. 이는 한(漢) 군현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작·선전된 것이었다. 뒤이은 중국 사서는 이 같은 신속(臣屬)의 연고권을 확대하기 위해 한사군의 옛 영역을 한사군의 밖에 있었던 ‘삼한(三韓)’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나아가 ‘삼한’이 ‘삼국’과 같은 의미인 것처럼 조작했는데, 이는 ‘삼한’의 영역 밖에 있었던 고구려는 물론 백제·신라까지도 ‘중국의 교화를 받은 땅’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이 아닌 ‘삼한통일’을 한 것이라면 옛 삼한땅이 아닌 북쪽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길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 기록에서 사라져버린‘삼국통일’

당(唐)나라 이후의 중국 사서(史書)에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801년의 ‘통전(通典)’은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이 모두 당나라의 정벌 결과였다고 기록했을 뿐 신라의 역할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구당서’와 ‘신당서’도 신라의 역할을 ‘백제 통합’ 정도로 축소하고 발해를 ‘동이’가 아닌 ‘북쪽 오랑캐’로 분류함으로써 고구려의 옛 땅을 고구려의 전통과 완전히 끊어 놓았다. 이후 ‘원사(元史)’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고 왕씨가 이를 계승했다’고 잘못 기록했는데 여기엔 중국측이 원하지 않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지워버리고 ‘삼국통일’을 한반도 안의 사건으로 국한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들어 있다.

명나라가 고려를 대신한 세력의 국호를 ‘조선’으로 인정한 것은 ‘동이’의 역사를 ‘(기자)조선=한군현=삼한’으로 설정함으로써 ‘동이’의 옛 땅을 포기하도록 한 것이었다.

◆ 한국은 ‘중화문명’의 곁가지?

결국 중국은 ‘동이’에 대해 자신들의 직·간접적인 지배가 필요한 곳이며 이들의 연고권은 삼한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역대 중국 사서가 만든 ‘동북관’은 ‘동이’에 대한 통제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축적된 결과였다.

역사상 중국이 말하는 ‘동북’의 최대 범위는 허베이(河北)성 동북부와 네이멍구(內蒙古)성 동부, 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까지 포괄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현재 중국은 중국사의 범위를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역사’로 설정하고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이란 묘한 개념을 만들어 역사상의 ‘주변민족’을 한족의 ‘형제민족’으로 삼고 있다.

이같은 중국의 역사인식에 따라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의 역사가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로서 ‘중화민족’ 역사의 일부로 편입된다면, 한국사는 중국에 흡수되지 않은 지류(支流)이며 ‘중화문명’에 참여하지 못한 야만·후진적인 집단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관점도 도출될 수 있다.

(조선일보 2003-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