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史 왜곡’ 심상찮다

최근 중국에서는 ‘동북연구공정(東北硏究工程·중국 동북부 지역에 대한 연구 작업)’이란 명분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고구려사 연구서를 전부 중국어로 번역해 소개하고,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중앙 정부의 입장에 대한 자국민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국가적 대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中國 역사에 편입 노골적 시도 ▼

이는 오래전부터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며, 중원정부를 대신해 그 지역을 위임 통치한 할거정권(割據政權)이었다는 그들의 공식 견해를 확인하는 데에 근본 취지가 있다. 여기에는 중국 55개의 소수민족 중에서 유일하게 번듯한 모국을 갖고 있는 조선족에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다민족 국가로서 소위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서의 공존만이 소수민족의 살 길임을 각인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중국은 ‘만국의 중심, 천하의 중앙’이란 뜻을 지니며, 중국의 통치자(천자·天子)는 언제나 천하의 중심에 군림한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중국은 또 황허(黃河) 유역에 자리 잡은 중원 왕조로서 그 힘과 영향이 미치는 주변 지역은 전부 자신의 영토이며 그 주민들은 자신의 신민(臣民)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다. 중국의 중심 지역은 황제가 직접 지배하고 그 변방은 제후국으로서 황제에게 칭신납공(稱臣納貢), 즉 조공(朝貢)을 함으로써 책봉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중국 황제는 중국과 4방을 지배하는 공주(公主)로서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를 갖고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중국적 견해는 근대 국가관이나 영토개념을 외면하고 영역(領域·frontier)과 영토(領土·territory)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고대사회나 지금이나 영토는 지속적으로 정치(행정적 지배) 군사(징용) 경제(조세 징수)의 강제 규범이 적용되는 배타적 공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을 위해 세금을 낸 일이 없고, 중국이 외국을 정벌하는 데에 군대 동원을 강요받은 일도 한번도 없다.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 됐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중국에 맞섰던 당당한 나라임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시조인 고주몽은 하느님의 자손(천자·天子)이었고, 1∼3세기의 고구려왕들은 중국 황제처럼 지방을 고루 순행하며 백성을 어루만지곤 했다. 또 고구려는 중국의 위협에 맞서 고조선 옛 땅을 수복해 대제국을 이룩했다. 1∼2세기에는 신(新)의 왕망과 후한(後漢) 세력을 물리쳤고, 3∼4세기에는 위(魏)와 전연(前燕)의 도전을 뿌리치면서 중국 동방진출의 거점인 요동을 공략해 확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침공해온 수와 당의 대군을 끝까지 물리쳤다.

중국이 종속관계로 설명하는 ‘조공’도 실은 중국과 주변국가가 공존하는 외교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국 역사서는 실제로는 대등한 외교관계의 나라에 대해서도 ‘조공’이란 표현을 써서 상대를 낮추고 자신의 위상을 높여 기술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고구려가 북위(北魏)를 비롯해 연(燕) 남제(南齊) 진(晉) 등과 동시에 ‘조공관계’를 맺었다는 사실도 조공이 특정 중심국에 대한 신속관계가 아님을 보여주는 실례다. 고구려가 특정 국가에 사신을 보냈다고 해서, 즉 중국식 표현으로 입조(入朝)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가 질책한 일이 없었다. 사신을 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외교수단이었을 뿐 고구려의 자주권과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았다.

▼ ‘주권국가’ 밝힐 노력 계속해야 ▼

고구려는 출발부터 중국과 다른 독립 국가였다. 고구려는 중국과 종족 언어 습속 전통이 다른 나라였고 끝까지 당의 정치제도(3성6부와 군현제)를 거부하고 독자적 정치체제를 지켰다. 만일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였다면, 중국은 그들의 코앞에 쌓은 그 많은 고구려 성곽과 천리장성을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막았다는 기록도 없고 막지도 못했다.

중국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국내의 대응은 미흡하다.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도 고려해야겠지만 적어도 학계 차원에서는 대응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형식 이화여대 국사학 교수>

(동아일보 200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