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일본에서는 살아 있다

일본 내 유적지 엔랴쿠지·미이데라 답사 … ‘신라명신’ 모신 신사 국보로 지정 관리 

신라선신당 안에 보존돼 있는 신라명신의 좌상(일본 국보).

한민족이 역사상 가장 숨가쁘게 질주했던 20세기 후반,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가장 걸출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박정희와 이병철일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기대에 못 미치고, 정주영과 김우중이 무너지면서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넘어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싫어했다. ‘없는 집안’ 출신인 박정희와 부르주아 태생의 이병철은 일치하는 코드가 적었으리라. 이러한 ‘다름’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이순신을 좋아해 서울 세종로에 세종대왕이 아닌 이순신의 동상을 세우게 했다.

이순신과 장보고는 ‘바다의 사나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 군인과 무역상이라는 차이점도 있다. 사업가인 이병철은 장보고를 영웅으로 만들자고 했다고 한다. 장보고냐 이순신이냐, ‘칼자루’를 쥔 박정희는 이순신을 선택했다. 교사에서 군인으로, 관동군에서 국군으로 적(籍)을 바꾸고, 남로당 영남 총책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박정희로서는 이순신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장보고는 전남 완도 태생으로 추정되는데,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가 설립됨으로써 비로소 영웅으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이건희 삼성 회장이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0억원을 쾌척했다. 대북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대북 루트를 뚫어준 국제옥수수재단에 지원한 돈이 5억원인 것을 고려한다면 10억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하찮은 인물로 묘사한 국내 사서
완도군이 엔랴쿠지 안에 세운 장보고비. 비문에는 ‘義憤’이 ‘義墳’(의로운 무덤)으로 잘못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사업회와 함께 일본 내 장보고 유적지 답사여행을 위해 부산항을 떠난 것은 10월7일이었다. 배가 부산 내항을 벗어날 무렵 태풍 ‘매미’로 부서져 내린 신감만부두의 갠트리 크레인 잔해가 강렬한 석양빛을 받아 두 눈에 들어왔다.

장보고(張保皐)란 이름은 당나라 문인인 두목(杜牧)이 쓴 ‘번천문집(樊川文集)’이란 책에 처음 나오고, 이어 이 책을 인용한 ‘신당서(新唐書)’에 나온다. 답사단을 이끈 김문경 숭실대 명예교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두목은 술을 좋아해 술집에 자주 갔는데 그곳에서 해상무역에 성공한 장보고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에게 매료돼 기록으로 남긴 것 같다”고 말했다.

두목은 적수공권으로 당나라에 건너와 대상(大商)이 된 신라인을 칭송했으나 정작 우리 기록은 시니컬하기 그지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중국 기록에 장보고로 돼 있는 사람의 이름은 궁복(弓福·활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이다. 그는 평민이므로 성(姓)이 없으며 미천한 섬 출신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삼국유사’는 그의 이름을 궁파(弓巴)로 적어놓았다.

신라명신의 좌상을 모시고 있는 신라선신당과 안내판.

국내 사서에는 왜 장보고가 ‘같잖은’ 인물로 묘사돼 있을까. 중국 산둥반도에서 손꼽히는 대상으로 활동한 장보고가 완도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한 것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인데 흥덕왕이 불러들인 것인지, 아니면 장보고가 자발적으로 들어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한·중·일 사이의 최고 무역품은 도기(陶器)와 자기(瓷器)였다. 도기와 자기는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사치품으로 귀족층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 이른바 도자(陶瓷) 무역이 성행했다.

이때의 무역선은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주로 연안을 따라 항해했다. 즉 완도에서 출항해 중국 저장성의 닝보(寧波)로 가서 도기와 자기를 실은 뒤 흑산도를 거쳐 한반도 남해안을 따라 항해하다 일본 규슈 북쪽의 하카다에 도착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環狀) 항로의 한복판에 완도가 있으니, 완도를 장악하면 무역을 독점하는 해상왕이 될 수 있었다.

청해진을 건설한 장보고는 이 항로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권을 독점했다.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대사(大使)’라는 직함을 내리고 우대했다. 당시 권력투쟁을 거듭했던 신라 왕실의 제 세력은 ‘해상왕’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이를 기화로 장보고 또한 파워게임에 참여했으나 김양(金陽)을 우두머리로 한 세력이 장보고의 부하인 염장(閻長)을 매수해 장보고를 암살했다(841년). 이로써 장보고는 하루아침에 반역을 꾀한 자가 되었으니 우리의 사서는 그를 성도 없는 섬 출신의 미천한 궁복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요카와 선원에서 신라명신을 모시고 있는 적산궁이라는 작은 신사와 안내판.

장보고가 청해진을 세우기 전 이미 신라는 상당한 수준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보고를 죽이더라도 이러한 기술은 살려나갔어야 했는데 후환을 두려워한 세력들은 장보고 암살 10년 후인 851년 청해진을 폐쇄하고 청해진 주민을 벽골군(전북 김제)으로 강제이주시켜 버렸다. 이로써 신라 해상무역의 뿌리가 뽑혀버렸다.

신라의 권력투쟁과 무관한 중국과 일본에서는 장보고를 묵살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 시가현 히에이 산에는 엔랴쿠지(延曆寺)라는 고찰이 있는데 이 절은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이다. 일본의 혁신불교는 천태종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이곳을 일본 불교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웅으로 부활할 때 민족 웅비”

신라인들은 장보고가 오기 전부터 한·중·일 항로를 장악했던 것 같다. 이는 일본 천태종 개조(開祖)인 사이초(最澄, 767~823)가 불법을 배우러 당나라에 가기 전 ‘신라국신’에게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고, 당에서 돌아온 뒤에는 신라국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신궁원(神宮院)’을 만들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3대 교조인 엔닌(圓仁) 또한 당나라를 다녀온 후 신라명신(新羅明神)의 가호로 안전하게 귀국했다며 신라명신을 절의 수호신으로 삼고 신라명신을 위해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게 했다.

적산선원은 엔닌이 입적한 지 24년 후 제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러한 적산선원과 별도로 엔랴쿠지 본 절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요카와 선원에는 적산궁(赤山宮)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적산궁은 신라명신을 모신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엔닌 등이 언급한 신라명신은 장보고이거나 아니면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신라 해상세력이 모셨던 해상신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사서는 특이하게도 장보고를 ‘張寶高’로 적고 있는데 이는 장보고가 일본의 무역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의 영이 서려 있는 엔랴쿠지에는 2001년 완도군이 세운 장보고비가 있는데 오자가 각인돼 있어 아쉬움을 주었다.

엔랴쿠지에서 자동차로 30분쯤 떨어진 시가현 오쓰 시에는 미이데라(三井寺, 또는 園城寺)가 있는데 이곳에는 당나라로 유학 간 엔친(圓珍) 스님이 귀국하는 배 안에서 만난 신라명신의 좌상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있다. 신라명신 좌상과 신라선신당은 모두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 신라선신당은 일본 사무라이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 ‘가게무샤’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주인공으로 한다. 다케다 신겐의 조상은 ‘미나모토(源)’라는 성을 썼는데,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는 신라명신의 위명에 감동해 신라선신당 앞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성을 신라사부로(新羅三郞)로 바꿔 ‘신라사부로 요시미쓰’가 되었다. 신라사부로 가문은 그후 영지(領地)의 이름인 다케다로 다시 성을 바꿨는데, 그 후예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쟁패한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인 다케다 신겐이다.

장보고는 한국에서는 죽었지만, 일본과 중국에서는 영웅과 신으로 살아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반역에 개입한 장보고를 굳이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박정희로부터 적잖은 공격을 받았던 이병철 가문이 오히려 장보고를 우뚝 세우고자 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는데, 장보고와의 대화는 이어질 수 없는가.

답사단의 한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 것인가. 제조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무역을 비롯한 서비스업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갈라섰던 세력들을 합세시켜야 한다. 박정희와 이병철이 화해하고, 이순신과 장보고가 똑같은 영웅으로 일어나 쓰러진 신감만 부두의 크레인을 일으켜 세울 때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는 열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 이정훈 기자 2003-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