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미스터리] ‘장고형 고분’

일본식 고분 발굴 韓日 표정

“명화동에서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6세기 당시 고대 일본은 백제와 가야지방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 또한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걸 입증한다”

1994년 5월20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1면 톱으로 광주 명화동 고분 출토사실을 보도했다.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입증시키는 이른바 원통형 토기가 처음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21일 아침 고분을 발굴했던 국립광주박물관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등 큰 곤욕을 치렀다.

가뜩이나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때문에 죽을 노릇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또다시 우길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유력지가 1면 머리기사로 다뤘으니 두드러기를 일으킬 만했다.

“그러면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입니까. 뭔가 대응책이 필요한 게 아닙니까”. 하지만 박물관으로서는 ‘학문적인 접근’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고형 고분’의 출현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알레르기 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여파는 1992년 도굴로 인해 긴급 발굴을 실시했던 함평의 신덕 고분에까지 미쳤다. 발굴이 끝나면 당연히 정식 발굴보고서를 내야 하는 것.

그러나 이 신덕 고분 보고서는 발굴한 지 11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오지 않은 상태다. 다만 행정용 보고서로만 작성됐을 뿐. ‘쉬쉬’ 하는 속내는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것. 일본의 경우 전방후원분 연구논문만 수천편이고 관련서적만 해도 수백권에 달하는 상황. 그런데 5명도 안되는 연구자만 분투하는 우리의 여건이 너무도 초라하다. 아직 능력부족이므로 좀 더 공부한 후에 자료를 내야한다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사실 연구결과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요즘 우경화 분위기가 짙은 일본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준비가 됐는지…”. 학자들의 걱정이다. 유적수가 워낙 적어 10여기에 불과하고 전남지방에 나타난 이른바 일본식 무덤을 연구해봐야 자칫하면 본전도 못찾는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한·일간 역사 공동연구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 여기서 그냥 방치할 수는 없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0여년간의 꾸준한 노력으로 임나일본부설 불식에 큰 도움을 주었던 ‘가야연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고형 고분’

-무덤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1972년)에서 시작되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83년)으로 이어진 일본식 무덤(장고형 고분) 논쟁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엉뚱하게 전남지역으로 번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젊은 학자들은 ‘신임나일본부설’을 혹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귀를 쫑긋 하며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들은 전면 부정했다.

전남지역에만 존재한 ‘장고형 고분’=그런 가운데 ‘나홀로 연구’에 몰두하던 강인구 교수는 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용두리 말무덤 고분 측량 조사결과 분명한 형태의 장고형 고분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여전히 “외형만 전방후원일 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던 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도굴꾼에 의해 유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긴급조사를 벌인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신덕고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 같은 방법으로 조성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上)편에서 밝혔듯 발굴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종합조사도 ‘쉬쉬’하며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한반도에 홀연히 나타난 일본식 무덤’이라는 이 ‘뜨거운 감자’를 쥐고 연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반면 80년대 ‘장고분’ 논쟁을 주도했던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동아대 박물관 발굴결과 ‘장고형이 아님’이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이미 70년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충남 부여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진 바 있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인 것이다.

일본식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 주구묘?=이제 ‘장고형 고분’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두가지였다. 이 무덤의 기원(起源)이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는 것과 그렇다면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향후 한·일 고대사 문제에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것이다.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선다는 뜻이다.

그런 전제 아래 장고형 고분의 기원문제를 살펴보자. 82년 김원룡 교수는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했다. 90년 북한의 리정남은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됐다”고 고구려 기원설을 폈다.

줄기차게 ‘한반도 기원설’을 주창해온 강인구 교수는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보았다.

기원설과 관련, 일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일본학계는 분구묘(墳丘墓),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들어 우리나라 전라도 지방에서 기원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구묘(묘 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측 주장대로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라면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한반도 주구묘의 잇단 발견은 일본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그렇다면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정서상’ ‘민족감정상’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앞으로도 달굴, 숙명의 논쟁거리이다. 그런데 먼저 고대사회에서 이같은 민족감정이나 국경의 개념을 논하는 게 무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전제 아래 갖가지 주장들을 검토해보자.

우선 한국인이라는 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이 ‘토착세력설’ 주장도 여러가지이다. ①먼저 당시 마한지역은 백제의 완전한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마한은 백제·신라·가야·왜(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편다. 그런데 이 영산강 유역 수장들이 왜(일본 규슈지방)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무덤인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이 있다. ②또 하나는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가정을 해보자. 이 상황에서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이 이런 규슈세력과 교류하면서 규슈의 묘제인 장고분을 썼다는 설도 있다. ③다른 견해도 있다. 백제가 영역을 넓히는 가운데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압박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동안 왜와의 왕래를 통해 ‘전방후원분’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다는 주장인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설 ①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②일본 연구자들 가운데는 왜 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중 일부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이 무덤은 백제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관료라는 주장이다.

마한의 망명객이라는 설 이와 관련,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독특한 학설을 편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마한 등에서 넘어간 한반도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와 가야사람들이 뭉쳐 야마토 정권을 세운다. 그 격변기에서 북규슈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이주민들이 망명객의 신분으로 다시 고향인 전남지방으로 건너왔으며 이때 일본의 장고형 고분을 썼다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은 일본에서 귀환한 ‘마한인’의 것”=모든 주장이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한반도에서 주구묘를 썼던 전남지방의 마한세력 중 일부가 왜로 이주했다. 그런데 왜로 넘어간 마한 이주민의 후예들이 다시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쳐 원래의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다. 이 무덤은 그때 쓰여진 것이 아닐까.

이들의 귀환은 당대 한반도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를 공주로 옮긴다. 대격변기였던 것이다. 백제의 지배구조가 바뀌고 약해졌다. 그 틈을 타 왜로 이주한 마한세력 중 일부가 대한해협을 건너 돌아왔다는 가설이다. 아무튼 이 무덤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명쾌하게 풀린 건 아니다. 문헌사학자들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실체에 접근할 터이다.

<조유전 / 고고학자>

한반도 ‘장고형 고분’싸고 日학계 고민

“한반도에 전방후원분이 있다는 건 ‘한여름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다”

“왜 없다고 단정하느냐. 한국학계를 고무시켜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 전남지방의 ‘장고형’ 고분 출현을 바라보는 일본학계의 시각 또한 복잡하고 첨예하다. 한국학계가 ‘신임나일본부설’의 악령 출몰을 걱정하듯 일본학계도 ‘찬반양론’의 소용돌이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전방후원분이 없다”고 주장하는 쪽은 이 묘제가 ‘일왕가계’의 무덤으로 신성시된다는 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고유의 것이자 최고권력자들의 무덤이 한반도에 있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 우려는 한반도의 옹관묘나, 주구묘가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류일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됐다. 가뜩이나 일왕가계와 백제계의 친연성이 드러나 있는 상황이니 더욱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면 ‘긍정론’을 주장하는 쪽은 고대사회에서도 일본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로 이 무덤을 보고 있다. 광주 명화동 고분 발굴을 아사히 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명화동·월계동의 ‘장고형 고분’을 발굴했던 성낙준 국립김해박물관장과 박중환 국립전주박물관 연구관 등의 말.

“긍정론자들은 한국학계의 연구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서 풋풋한 전방후원분이 나오니 우릴 부러워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 일본의 경우 전방후원분이 천황묘로 되어있고 아무리 학자라도 접근하기가 힘들거든요”

물론 지금 이 순간 한반도 남부의 장고형 고분 출현을 두고 ‘신임나일본부’를 내놓고 주장하는 일본학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란 시대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일.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는 유난히 민족의식을 강조할 수밖에 없고 역사는 그 바람을 타게 된다. 그러니 우리나 일본이나 잔뜩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성낙준 관장은 “우경화 경향이 짙은 현재의 일본에서 극우파 고고학자인 야나기다 같은 이는 한반도 토착세력의 유물도 일본산이라고 주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주장들이 우경화 바람을 타고 교과서에 실리기라도 하면…. 문제는 역사를 오늘날의 민족·국가 개념으로 바라보면 우리나 일본학계나 늘 그 모양 그 꼴이 된다는 점. 고대에 무슨 국가나 민족의 개념이 있었을까. 그런 관점에서 마한과 왜(倭), 그것도 북 규슈지방의 교류 등을 살피면 해답은 쉽게 나올 수도 있다.

(경향신문 / 이기환 기자 2003-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