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하의 새로 쓰는 한국문화]<4>우리민족의 뿌리

한국 민족의 뿌리는 무엇인가? 한국 민족은 어디서 기원했는가?

단순화해서 역사사회학적으로 말하면, 가족들이 분화하면서 모여 씨족을 형성하고 씨족들이 모여 부족(종족)을 형성한다. 그리고 부족들이 결합하여 원민족(原民族)을 형성하면서 ‘문명’ 단계가 시작된다. 한국민족의 뿌리와 기원 문제는 어떤 부족들이 결합하여 한국 원민족을 형성하는가의 문제부터 시작된다.

한국 민족의 기원 형성 부족들에 대해서는 현재 ①이병도 교수의 ‘예맥(濊貊)’ 1부족설 ②김상기 교수의 ‘예’ ‘맥’ 2부족설 ③필자의 ‘한(e·韓·桓·寒)’ ‘맥’ ‘예’ 3부족설이 제시되어 있다. 앞의 두 견해는 선구적 큰 업적을 내었지만 그간 오래 고찰해 왔으므로 여기서는 필자의 의견을 설명하여 조금이라도 참조에 보탤까 한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魏書)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檀君)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하여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고조선(한국민족의 원민족)을 세운 부족들이 한국 민족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중국 고문헌들은 고조선이 존속했던 시기의 구성 부족들에 대해 단편적으로 ‘한맥(e貊)’ ‘예맥(濊貊)’ ‘한예(寒濊)’ 등을 기록하였다. 이 중 ‘상서정의(尙書正義)’가 ‘한맥(한貊)’이라 기록한 것을, 정현(鄭玄)은 한(e)은 “저들의 한(彼韓)”이라고 하였다. 즉 한(e)은 고조선의 한(韓)이라 한 것이다. 이들을 사회학적으로 토템에 의해 분해하면 한(e·韓·桓·寒) 맥(貊) 예(濊)의 3부족이 부각된다.

‘삼국사기’ 고기(古記)의 단군설화는 고조선 건국에 관련된 것으로 ①천손(天孫)족(환웅·桓雄) ②곰 토템족(웅녀·熊女) ③범 토템족을 들고 있다. 모든 자료들에서 공동으로 검출되어 나오는 고조선 건국의 부족들은 다수 종족들을 단순화시켜 분류하면 ①‘한’부족 ②‘맥’부족 ③‘예’부족의 3부족이다.

‘한’부족은 ‘태양(해)숭배’부족이었고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천손 의식을 가진 부족이었다. 중국 고문헌에 e·韓·桓·寒 등 여러 문자로 표기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고조선 고유어 ‘한’의 한자 소리표기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고조선 건국에 처음부터 참가한 ‘한’부족은 한강 양안과 대동강 사이에서 신석기시대에 가장 먼저 농경생활에 들어간 선진부족이었으며 한강 이남의 한반도에도 널리 분포되어 살았다.

‘맥’부족은 곰 토템부족으로서, ‘후한서(後漢書)’는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라고 하였다. 만주 쑹화강 유역으로부터 압록강 중류와 청천강·대동강 상류까지 내려와 살던 부족이었다.

‘예’부족은 범토템 부족으로서, ‘후한서’는 “(예는) 범(虎)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고 기록하였다. 예족은 그 일부가 대체로 맥족과 동일 지역에 분포되어 살았다.

고조선을 건국할 때 이 3부족이 모두 결합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3부족이 접촉한 접점지역의 한·맥·예 부족이 결합하여 고조선을 세웠다. 3부족의 결합방식은 ‘한’족이 군왕을 내고 ‘맥’부족이 왕비를 내는 혼인동맹에 기초하였다. ‘예’족은 통치권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가지면서 결합했다는 사실이 고조선 해체 때 ‘예군 남여(濊君南閭)’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국 고대에서 혼인동맹의 결합양식은 고조선·부여를 계승하면서 천제(天帝)의 자손이라고 의식했던 고구려 건국에서도 볼 수 있다.

고조선 건국과 한국 원민족 형성에서 ‘한’부족을 놓치면 고조선연구가 진전되기 어렵다. ‘한’족에서 ‘천제(天帝)’ ‘군왕’을 내었기 때문이다. 고대 국가에서 황제·왕 계통을 빼고는 역사가 제대로 설명되기 어렵다고 본다.

‘시경’ 한혁편(韓奕篇)은 연(燕) 세력과 대결했던 ‘한(韓)’이 ‘예’와 ‘맥’을 통합하고 북국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렸다는 노래를 수록했다. 여기서 북국은 공자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서 말한 ‘구이(九夷)’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것은 고조선 왕족 계열이 북국의 이른바 아홉 이(夷)를 모두 통치한 시대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중국 고문헌은 상당수 있다.

고조선은 한·맥·예 3부족결합으로 한반도에서 건국된 후 같은 부족들이 거주하는 북서쪽으로도 급속히 뻗어나가 거대한 ‘고조선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필자는 고조선문명권에 포함되어 있던 모든 부족과 원민족들이 왕을 ‘한(khan)’ 또는 ‘칸(kahan)’이라고 호칭한 것도 고조선 왕 계통 ‘한’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국 민족들의 군왕들이 자기의 성씨를 단(檀), 대단(大檀), 환(桓), 아사나(阿史那) 등으로 스스로 표기한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24세기경에 한반도 ‘아사달’에 건국되어 기원전 2세기 해체될 때까지 3개 왕조를 거치면서 내려오는 동안에 통합된 하나의 ‘고조선 민족’을 확고하게 형성했고, 공통의 고조선언어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2세기에 고조선이 해체되었을 때에는 그에 포함되었던 한·예·맥족과 기타 부족들은 이미 공통의 고조선조어(古朝鮮祖語)를 분유하여 그 후 3국시대에 이르러서도 3국은 통역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늘의 한국민족의 뿌리는 한·맥·예 3부족을 원뿌리로 하여 이들이 결합해서 고조선을 세우고 고조선 민족을 형성했으며, 고조선 민족이 한국 민족의 원민족이 된 것이다.

<신용하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동아일보 2003-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