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칭기스칸’ 고선지를 아십니까

토번(티베트) 정벌해 서역 72개국에 조공 받아
제지술 서역 전파해 ‘유럽 문명 아버지’ 역할
세력 강해지자 조정서 누명 씌워 살해

국내 유일의 고선지 전문가인 연세대 지배선 교수가 최근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이란 책을 통해 1200여년 전 고구려인 고선지의 활약상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실감나게 부활시켰다. 고선지는 단순히 당나라 때 성공한 무장(武將)이란 차원이 아니라 세계사를 뒤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세계사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즉 고선지는 1만명의 병력을 동원, 당시 인간의 한계로 여겨진 해발 4600m ‘파미르 고원’을 넘어 지금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을 평정,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서역을 중국 휘하에 넣었다. 그는 이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패전지장에게 ‘유럽 문명의 아버지’란 평가를 내렸다. 당시 패배로 사라센에 끌려간 당나라 포로들이 서역에 제지술·화약·나침반 등 첨단 기술문명을 전파함으로써 결국 유럽이 문명화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고선지 장군 서역정벌 루트
고선지는 고구려인으로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벌한 우리의 조상이다.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은 고구려 유민 출신인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동서 문명 교류사에 남긴 커다란 발자취를 추적한 책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당에 의해 패망한 후 당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던 고구려 유민들이 신분 상승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군인이 되는 길밖에 없었던 과정에서 고선지라는 인물이 서역을 호령하는 장군이 되었던 과정에 대한 연구서이다.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난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다가 젊은 시절에 중국 서부 쿠차에서 군인으로서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때 우전진과 달해부를 공략하였던 사실을 당 현종이 높이 평가하여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라는 특수직의 장군으로 발탁했다. 747년 당에서는 토번(지금의 티베트)을 제압하기 위해 기병 1만을 이끌고 토번을 공격하라는 당 황제 현종의 칙서가 전달되어 이를 실행하는 작전을 고선지가 총괄하였다.

당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고선지는 1만이나 되는 기병을 이끌고 거의 4개월 동안의 대장정 끝에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횡단함으로써 19세기 초엽에 그 원정길을 답사한 스타인을 경악케 하였다. 이는 서양의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횡단(해발 2500m)했던 것보다 더 험준하고 높은 산악 탄구령(해발4600여m)을 고선지가 통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선지는 탄구령을 왕복하였으나,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탄구령보다 2000여m나 낮은 알프스 산을 공격 때만 지났을 뿐 회군 때는 지중해의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아무튼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토번 서북단의 전진 군사기지 연운보(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동쪽 끝)를 점령하고 나서 계속 진군하여 토번의 속국 소발률국(오늘날 파키스탄의 길기트 지방)을 점령, 그곳에 당나라 병사를 주둔시키고 개선한 전대미문의 승전보를 거두었다.

●서역의 헤게모니, 당나라로 이동  

 
서역정벌 모습 상상도
고선지에 의한 토번 정벌의 성공은 서역 72개국이 당에 조공하는 상황으로 바꾸었다. 정확히 말해 서역의 헤게모니가 토번에서 당나라로 이동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당나라에 조공한 72개국 가운데는 아랍은 물론이고 동로마제국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고선지의 토번 정벌은 당의 서북방의 안정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던 전쟁이다.

750년에 고선지가 아랍권 석국(타슈켄트)이 당에 대한 조공을 태만하게 하는 죄를 물어 그곳을 공략하였다. 이때 고선지가 볼모로 잡아온 석국 왕을 당 조정의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장안에서 죽임으로써 아랍권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아랍인들이 당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다.

아랍연합 세력을 선제 공격하기 위하여 고선지는 군대를 거느리고 석국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워낙 강력하게 아랍권이 연합하여 고선지 군대를 협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선지 휘하의 유목부족 케르룩마저 반란을 하였기 때문에 고선지는 탈라스 강가에서 참패하였다. 아랍연합 세력에 의한 탈라스 협공과 고선지 휘하의 유목부족 케르룩 부중의 반란은 고선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최초의 참패였다. 그런데 고선지 휘하의 군인 가운데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사라센의 포로가 되었던 사실을 서양 역사가들이 주목하였다. 그 중에서도 포로가 된 제지술·화약·나침반 기술자들로 말미암아 서방세계가 신문명을 접하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특히 역사가 크리스토퍼 베크위즈나 버나드 루이스 등은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고선지 휘하의 당군 포로들이 종이 만드는 제지술을 서구로 전파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탈라스 전투 이후 알려지기 시작한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켜 다마스쿠스까지 전파되었다. 또 다시 스페인에 이슬람 세력권의 그라나다 왕국(898~1492)이 성립됨으로써 그곳에도 자연스럽게 제지술이 전파되었다. 때는 1150년경이다. 그 후 제지술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시실리로, 콘스탄티노플을 통하여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다시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 필라델피아까지 전파되었다.

●나침반도 고선지에 의해 전파된 듯

나침반이 서방으로 전파된 것도 탈라스 전투에 패배한 고선지 휘하의 당군 때문인 듯싶다. 그 이유는 지남철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가 한대(漢代)로 알려지고 있는 터에, 이슬람 인들에 의해서 나침반이 종교의례(성지 메카를 향해 절을 할 때 방향을 잡는 데 활용)와 항해에 이용되었으며, 이것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서양인의 문명사적인 시각에서 고선지의 역할을 유럽 문명의 아버지로 평가하였던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물론 고선지의 탈라스 패배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탈라스 전투 패배 후 뚜렷한 관직이 없었던 고선지는 755년 절도사 안록산의 반란을 막을 길이 없게 된 당 조정에 의해 황급히 반란군 진압 장군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이때 고선지는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당 현종의 작전 지시와 달리 전술상 요지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관으로 후퇴하여 반란군의 공격을 막았던 게 도리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중세기사들은 등자를 이용해 말 위에서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할수있었다.
현종이 안록산 반란 진압을 위해 출정하는 고선지에게 섬주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한 것을 고선지가 어겼다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 고선지가 황제의 명령을 어긴 이유는 당조의 서울 장안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섬주가 아닌 전략적 요지 동관을 지키기 위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방어의 개념이 바뀌게 되어 당의 군사 보급기지이자 북도(北都)인 태원이 안록산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고선지는 태원창에 있던 관물의 일부를 가져오고, 그 나머지 물건은 안록산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웠다.

당조에서는 현종의 총애을 받고 있었던 이민족 출신 안록산이 당의 절도사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게 늘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인 고선지가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한 후 그의 강력한 세력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하던 상황에서 고선지를 죽이기로 현종과 환관들이 뜻을 모았다. 그 결과 고선지는 당을 위해 공을 세우고도 죽었다. 이때 고선지는 자신이 살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부하의 도움으로 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하였다는 내용을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 기록하고 있다. 고선지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당에 의해 패망한 고구려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의 어떤 모욕도 원치 않았는지 모른다.

●서방세계와의 교통로 확보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고구려인들의 우수성을 알리려는 목적이다. 이는 고선지를 연구한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당에 잡혀간 고구려 유민들은 모두 당나라의 노예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고선지는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지 못했다. 때문에 당나라에서 노예를 벗어나는 길은 군인 외에 선택이 없었다. 당시 당나라의 절도사(당의 변방에서 군사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직책)들 대부분이 이민족 출신이었다.

둘째 고선지는 탁월한 전략·전술가였다는 사실이다. 8세기 당나라를 세계국가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같은 인물이 중국의 서방을 지켰기 때문에 이른바 ‘실크로드’라는 동서를 잇는 교통로가 안전하게 확보되어 당과 서방세계와의 교류가 원활할 수 있었다. 또 당이 세계국가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게 당 나름대로의 걸출한 인재 등용을 통한 세계화였다.

셋째는 고선지 장군에 의해 종이 만드는 기술이 서방세계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이다. 고선지 장군 휘하의 병사 가운데 많은 기술자들이 포함되었는데, 그 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도 함께 사라센의 포로가 되었다. 이들에 의해 처음에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이 세워졌고 뒤이어 바그다드, 다마스쿠스에도 건립되었던 사실 때문에 동서교류사를 연구하는 서방 학자들이 고선지를 주목하였다.

그후 몇 세기가 지나 제지기술이 유럽으로 전파되어 드디어 1456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42행 성서’를 찍어내면서 서양에서 개신교가 등장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하였다. 이와 같은 제지술의 위력이 서양의 지식산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을 신문명 사회로 이끄는 역동적 에너지를 제공했다. 즉 서방으로 전래된 제지기술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이어 산업혁명으로 유럽 문명을 한단계 도약시킨 그런 발전적인 도구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제지술의 서방 전래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제국의 출현을 가져오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선지 장군이야말로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한국인 중 하나다.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한민족이 우수하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세계사에 제시되게 한 인물이 고선지이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인물을 소개했다는 사실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지배선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선지 연구가 지배선교수 인터뷰

“고선지는 서양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한국인”

“한국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국내 유일의 고선지 연구가인 연세대 지배선 교수는 ‘고선지’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1999년 7월이었습니다. 서구의 고선지 연구 현황을 살펴볼 요량으로 일년 간 미국 인디애나 대학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중앙아시아 역사 전문가인 크리스토퍼 교수를 만났지요. 그가 ‘한국 사람들은 왜 고선지에 관한 연구를 깊이있게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묻더군요. 부끄러워서 혼났습니다.”

이날 이후 지 교수는 인디애나 대학 도서관에 ‘터’를 잡는다. “연구물을 뒤져 보니 고선지라는 이름 석자가 웬만한 문화사나 문명사 책에 거의 다 언급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아랍 역사책도 마찬가지더군요. 고선지는 서양 역사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는 ‘고선지’라는 인물이 서양 역사가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 고선지가 왜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국내 학자에 의한 고선지 연구는 1965년에 민영규, 이용범 선생이 발표한 짧은 논문이 전부였습니다. 아마 일제 강점에 따른 식민사관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사실 일제 때 고선지에 관한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학자인 스와 요시노리(諏訪義讓)가 1942년 고선지에 관한 짧은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지 교수는 “1965년 이후엔 국내에서 고선지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일본인들에게서 역사를 배운 선배 학자들에게 고선지 연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생각됐다”고 말했다.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늘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로만 주장해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역사 연구가 너무 제도사 일변도로 치중해 온 것 같다는 반성도 하게 됐지요.”

우리 사료에는 고선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잊혀진’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주변국가는 물론, 아랍권과 서양의 자료를 포함해 그들의 연구 성과물을 종합적으로 비교·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 교수는 이때부터 자료 수집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미국과 유럽에 있는 자료들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모두 다 구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 도서관의 인프라가 무척 발달했기 때문에 굳이 발로 뛰지 않아도 전국의 자료를 한 곳에서 다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 교수는 “고선지 연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의 시야를 넓히는 일이었다”며 “그래야 우리 역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연구를 하면서 나라의 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역사학이 발달한 나라들은 모두 부강한 나라들이었습니다. 고선지에 대한 연구를 가장 활발하게 했던 나라는 20세기 초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이었습니다.”

지 교수는 “식민지 경영으로 부강해진 국력을 바탕삼아 학자들이 앞다퉈 세계 도처를 누비는 과정에서 고선지 연구가 관심의 대상이 됐다”며 “우리나라에서는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고선지의 행적에 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고선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서양 학자로 영국의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을 꼽는다. 그는 고선지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중앙아시아로 날아가 ‘고선지 루트’를 직접 답사했다고 한다. 지 교수는 “이러한 학풍은 영국이 한때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경영하며 ‘해가 지지 않는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고선지 연구’에 관한 두 번째 선진국은 프랑스. 영국 다음으로 많은 식민지를 경영하였던 프랑스에서는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와 폴 펠리오(Paul pelliot), 르네 그루세(Rene Grousset) 등이 대표적 고선지 연구가로 꼽힌다고 한다.

지 교수는 “오늘날에는 미국의 크리스토퍼 베크위즈(Christopher l. Beckwith)나 영국의 수전 휫필드(Susan Whitfield) 등이 대표적 고선지 학자들” 이라며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고선지에 대한 행적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역사 교과서나 문화사 책에서 고선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무엇으로도 변명하기 어렵다”며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고선지가 누구인지, 그가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주간조선 / 이범진 기자 2003-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