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필사본은 신라시대 작품”

경제사 전공인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李榮薰) 교수가 학계에서 진위 논쟁이 치열했던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은 신라시대 작품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논문이 최근 출간된 역사학회(회장 이태진) 계간지 ‘역사학보’ 176집에 게재됐다.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명시적으로 주장한 글이 역사학계의 전통있는 권위지인 역사학보에 실린 것은 처음이다.

이 교수는 ‘화랑세기에서의 노(奴)와 비(婢)-삼국시대 신분제 재론’이라는 제목으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난 노와 비는 조선시대 이래 우리에게 익숙한 천민(賤民)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며, 이러한 노비의 개념을 20세기에 어떤 누군가가 창작해 낼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여 지적하기도 싱거울 정도”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인 2001년 11월 한국고문서학회 월례발표회에서 이 논문을 발표한 후 일부 손질을 거쳐 지난해 초 ‘역사학보’에 투고했으나 화랑세기를 위서(僞書)로 보는 주류 역사학계의 반발에 막혀 게재가 보류돼 왔다.

역사학회 편집위원회는 수개월간의 논란 끝에 이 교수의 논문을 게재하면서 이례적으로 ‘논문 수록 자체가 ‘화랑세기’의 진위에 대한 학회측의 판정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논문 심사자인 지승종(池承鍾)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의 심사평을 실었다.

지 교수는 심사평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의 혐의를 끝내 벗지 못할 경우 이 논문 또한 무위로 돌아갈 것임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화랑세기’에 드러난 노와 비는 주인이 일방적인 생사여탈권을 쥔 소위 천민이 아니라 단순한 주종(主從)관계를 나타내는 개념. 예컨대 사다함의 어머니인 금진(金珍)의 경우 남편 구리지가 전사한 다음에 거느린 다섯 남자 중 한 명인 설성(薛成)을 ‘사노’(私奴)라 하고 있으나 여기서 노란 천민층이 아니라 단순히 서민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삼국시대의 노가 신(臣)의 뜻으로 쓰인 것은 공적 군신(君臣)관계와 사적 주노(主奴)관계가 아직 분화되지 못한 사회구조를 반영하며 이런 노의 관념은 13세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모든 위서는 스스로 모순과 혼란을 일으키는 언어의 복잡 코드에서 조만간 그 정체가 들통나게 마련”이라며 “천년 가까이 숨겨져 온 언어의 복잡 코드가 노비를 극도로 비천시했던 20세기 전반의 인물에 의해, 그것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한 재야사가에 의해 훌륭히 구사됐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화랑세기는 박창화(朴昌和)란 인물이 일본 왕실 소속 도서관인 궁내성 서릉부(宮內省 書陵部)에 근무하던 1934년에서 45년 사이에 필사한 것으로 알려진 책으로 서강대 이종욱(李鍾旭) 사학과 교수 등 일부 사학자만 진본으로 인정하고 있다.

(동아일보 / 송평인 기자 2003-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