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한국, 부탄] ‘과거로의 여행’

변화 거부한 채 전통 지켜온 몽골족의 ‘살아있는 박물관’

부탄은 히말라야 산속 깊숙이 자리잡은 ‘은둔의 왕국’이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도 부탄을 다녀온 사람들은 전세계 통틀어 10여만명밖에 안된다. 그만큼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지리적 이유 때문이다. 남쪽으로 인도와 바늘구멍 같은 통로가 있을 뿐 사방이 온통 험준한 고산(高山)에 둘러싸여 있어 접근이 용의치 않다. 비행장이 생기기 전인 1970년대만 해도 부탄 여행을 하려면 최단 코스인 인도 북쪽을 통해서도 보름~한달을 잡아야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부탄인 스스로 외부인과의 접촉을 원치 않는다는 데 있다. 이른바 폐쇄주의랄까 단일혈통(민족)주의랄까, 이들은 역사적으로 외부세계와 극히 제한적 접촉만을 했을 뿐 히말라야 두메산골에서 ‘자기 식대로’살아왔다. 19세기 조선, 20세기 북한처럼….

때문에 부탄은 세계화된 지구촌 속에서 마지막 남은 ‘고립된 섬’이다. 선사(先史)에 이어 역사(歷史)시대 수천년간 지구촌에선 많은 것이 변하고 사라지고 새로 생겼으나 부탄은 이와 절연한 채 ‘과거’의 모습을 아직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운이 좋다면 여러분은 500년 전, 1000년 전, 2000년 전의 부탄인들과 그들의 문화, 습속을 그대로 접할 수 있다.

얘기는 이제부터다. 부탄이 왜 우리의 관심을 끄느냐 하면 이들이 우리와 모든 면에서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사진과 필름을 통해 부탄인들의 모습을 처음 접해보고 마치 잃어버린 우리 먼 친척을 만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생김새, 표정, 동작은 영락없는 ‘한국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의 울긋불긋한 색동저고리 같은 옷차림,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전통복장, 활쏘기, 제기차기, 기마, 탈춤, 성황당 심지어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음식 등은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골에서 살아 숨쉬던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었다.

드디어 2000년 10월 어렵사리 부탄 비자를 받아 신분을 숨기고 입국, 지냈던 며칠간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지낸 듯한 느낌이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마치 수천년 전 헤어진 동족 친척 형제들을 만난 듯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이런 느낌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들의 걸음걸이 말투 표정 등이 영락없이 ‘붕어빵’인 것을 느꼈을 때 말이다. 좀더 나아가 외국에 나갔을 때 우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일본인·중국인과 구별되는 한국인 동족을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우리만이 느끼는 동류(同類)의식 같은 것 말이다.

바로 그런 기분을 부탄인들에게서 느꼈다. 홍콩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늘 만나는 홍콩인·중국인들에게선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이제 여러분들은 부탄인들의 삶과 모습을 접하면서 ‘같은 피’ ‘비슷한 유전인자’라는 것이 얼마나 완강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시간이 수백·수천·수만년 지나도, 지역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피, 비슷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형제들이라면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흡사하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부탄인과 한국인과의 비교는 아직 학계에서 검증된 이론은 아니다. 부탄에 대한 연구는 과거 식민국 영국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극히 부분적으로 이뤄져 아전인수격이 많다. 그러나 몽골 뿌리를 지닌 한국인 저널리스트 입장에서 볼 때 부탄인은 한국과 영락없는 한 뿌리다.

이런 관점에서 부탄은 잃어버린 우리 과거를 찾는 ‘보고(寶庫)’일 수 있다. 그들의 완강한 단일혈통정신, ‘우리 식대로 살기’, 급한 성격, 감정적 기질, 두주불사(斗酒不辭) 술꾼의 나라, 고추로 대표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기질, 나이에 따라 서열이 이뤄지고 노인을 공경하는 습속, 호랑이·곰·봉황·성황당의 전설이 살아숨쉬고 활쏘기·탈춤과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곳, 야트막한 산 자락에 자리잡은 목조가옥, 그 앞에 펼쳐진 논·밭 풍경은 바로 우리 ‘사촌형제’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 부탄으로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주간조선 / 함영준 편집장 2002-11-21)

[또 다른 한국, 부탄] 히말라야 산속엔 ‘우리 사촌들’이

매운 반찬에 쌀밥, 음주가무 즐겨…술은 ‘뻗을 때’까지
치마 저고리 입고, 제기 차고, 공기놀이

“고추먹고 맴맴, 막걸리 먹고 맴맴.”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음주가무를 즐김. 일단 술을 입에 대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려 함. 치마 저고리를 입고 쌀밥을 먹음. 남자아이들은 제기를 차고 여자아이들은 공기놀이를 함. 쥐, 소, 호랑이…. 자기가 태어난 해에 따라 12개의 ‘띠’를 갖고 사주팔자를 봄. 꼭 믿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을 쓰게 됨.’

‘어?’ 의아해하지 마시라. 한국인에 관한 서술이 아니다. 이상은 부탄인에 대한 서술이다. 부탄은 놀랄만큼 우리와 닮았다. 나라 이름부터 그렇다. ‘부탄’이란 지명의 옛 이름은 ‘바오 탄’. 아프가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등의 ‘탄’이 우리말 ‘땅’과 같은 뜻이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부탄의 옛 명칭 ‘바오 탄’의 ‘탄’도 땅을 뜻한다. 문제는 ‘바오’다. 바오는 높다는 의미다. 우리 고구려나 고려의 이름 ‘높고 아름다운 나라’와 상통한다.

 
▲ 시골 아낙: 부탄의 여성들은 남성 못지않게 일을 많이 한다. 여성이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도
남성에 뒤지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부탄이란 이름보다 토속 명칭인 ‘드룩 율(druck yul)’을 즐겨 쓴다. 안내를 맡은 부탄인 잠베이는 “드룩 율이란 ‘천둥소리를 내는 용의 나라’란 뜻”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옛 이름도 ‘천둥소리를 내는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진(震)’이 그예다. 국내 유일의 부탄연구가인 중앙대학교 민속학과의 박환영 교수는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천둥소리를 뜻하는 진(震)은 동방을 일컫는 말’이라 했다”며 “발해의 옛 이름이 진(震)이었고,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사용한 이름이 마진(摩震)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와 부탄간의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라 이름에서 나타나듯 부탄 사람들은 용을 좋아한다. 신성시하고 숭배한다. 국기부터가 용이다. 봉황도 그렇다. 이곳 말로 ‘제충’이라 부르는 봉황은 부탄에서도 상서롭고 신성한 상상의 동물로 숭배받고 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한국 봉황과 똑같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볼 수 있고 오늘날 청와대 집무실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봉황이다.


●우리처럼 용·봉황·호랑이 숭배

 
▲ 지붕위의 고추: 빨간 고추가 지붕위에서 익어간다. 부탄 사람들도 가을이 되면 고추를 지붕에 널어 말린다.
그렇다면 다른 동물들은? 놀라지 마시라. 이곳에서도 호랑이는 경배의 대상이다. 무섭기만 한 동물이 아니다. 우리나라와 똑같이 장난도 치고, 벌도 주고, 골탕도 먹이며, 사람을 돕기도 하는 생활 속의 ‘산신령’이다. 또 있다. 이곳 사람들도 우리처럼 태어난 해에 따라 고유한 띠를 갖는다. 우리가 쓰는 10간 12지를 그대로 쓴다. 순서도 같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돼지로 끝나는 것까지 우리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닭띠’ 대신 ‘원앙띠’를 사용한다는 것 뿐이다.

부탄 사람들도 ‘사주’를 본다. ‘체’라 불리는 부탄 사주는 자신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기준으로 10간 12지를 짚어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다. 보는 방법도 우리와 같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선 아이를 막 낳았을 때 한번에 한해, 고승들이 봐준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점집이나 철학원이 따로 있지는 않다. 친한 고승을 찾아가도 여간해서는 봐주지 않는다. 아이들의 엉덩이에 몽골반점이 있다는 사실은 새삼 밝힐 필요도 없다.

부탄인의 생활을 보면 더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리둥절해진다. ‘외국인지 고국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곳 사람들도 쌀밥에 고추가 주식이다. 치즈에 고추를 버무려 만든 ‘헤마다쉬’는 부탄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반찬이다. 겉절이 같은 김치도 있다. 배추와 오이를 고추가루에 버무린 ‘호게’가 그것이다. 맛은 조금 다르지만 모습은 영락없다.  

 
▲ 낟가리: 우리나라의 시골 풍경? 아니다. 부탄의 시골이다. 낟가리 해 놓은 부탄의 농촌모습이 똑같다.(위), 시내전경: 공항이 위치한 파로 시내 전경, 도로 옆으로 늘어선 건물 풍경이 신라 고도 경주 거리를 연상케 한다.(가운데), 공기놀이: 부탄의 어린이들도 우리 아이들처럼 공기놀이를 한다.(아래).
그들도 우리처럼 매운맛을 좋아한다. 부탄의 고추는 작다. 하지만 그 작은 고추가 무지하게 맵다. 먹는 방식은 우리와 약간 다르다. 그들은 고추를 소금에 찍어먹는다. 파로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페마 초덴(Pema Choden)씨는 “고추를 소금에 찍어 먹으면 매운맛이 줄어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한국 사람들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다”고 하자 “우리보다 더하다. 매워서 어떻게 먹느냐”며 깔깔 웃었다.

가을이 되면 이곳 사람들도 지붕이나 마당에 고추를 널어 말린다. 벼가 익어가는 황금색 들판과 빨간 고추의 조화는 어디서 많이 보던 낯익은 모습이다. 추수하는 논에 낟가리가 쌓여있고, 타작하는 농부들이 주변을 오가고, 첩첩이 쌓인 계단식 논을 소들이 거니는 모습은 우리 할아버지가 사셨던 ‘고향의 모습’ 그대로다. 사람들의 얼굴 모습도 ‘정확히’ 우리와 똑같다. 1989년 한국에 와 본 적이 있다는 부탄 통화관리위원회 이사 데첸 체링(Dechen Tshering)씨는 “한국에 가보고 나도 놀랐다. 유사한 점이 너무 많았다”며 “아마도 우리는 같은 민족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디선가 나무 타는 냄새가 났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됐다. 공기놀이를 하고 제기를 차던 꼬마들이 집으로 달려간다. 공기는 돌을 주워 놀고, 제기는 풀을 뽑아 찬다. 놀다 지치면 그 자리에 버리면 된다. 돌과 풀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하나가 된다. 환경오염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탄에선 난방도 장작으로 한다. 전기는 일부 부유층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수도 팀푸같은 대도시 얘기다. 지방으로 조금만 가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정부는 환경오염을 막는다며 화석연료 사용을 금지시켰다. “나무를 때면 삼림이 황폐해지지 않느냐”고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식수율이 높아 오히려 숲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부탄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99년 삼림률은 65%. 안내인은 “2년 후인 2001년엔 67%로 비율이 2% 늘었다”고 말했다.

부탄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보통 해발 2000m가 넘는 고도여서 일교차가 20도에 이르기도 한다. 더구나 히말라야 산자락 무공해 지역이라 낮엔 청정 하늘에서 내리쬐는 자외선 열기로 반소매를 입을 만큼 덥다. 그러나 해가 진 밤엔 외투를 껴입어도 떨릴만큼 춥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차와 술을 즐긴다. 우유에 설탕을 넣어 만든 ‘나자’와 소금과 버터를 차에 섞은 ‘수자’는 이곳의 대표적인 차다.

‘수자’를 청해봤다. 차 위에 기름이 동동 떠있다. 잔이 온통 기름투성이다. 조심해서 잡고 있지 않으면 떨어뜨릴 것 같았다. 주인이 차나 술을 권하면 받는 사람은 두손으로 공손하게 받는 것이 예의란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왼손을 오른손 바닥에 붙이고 조심스럽게 주고 받아야 한단다. ‘수자’를 마실 때엔 쌀 튀김과 옥수수 튀김을 안주처럼 곁들인다. 우리 뻥튀기와 똑같다. 맛도 생김새도 정확히 일치했다.

‘수자’는 찝찔했다. 홍차에 소금을 타 마셔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해보시라. 야크(소의 일종)로 만든 버터도 좀 섞어야 제격이다. 묘하다. 느끼하고 찝찔하다. 3분의1 정도 마시자 식당주인 페마 초덴씨가 “한 잔 더 하겠느냐”고 권했다. 거절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다. 한 잔을 더 받았다. 반쯤 마시자 또 한 잔을 권했다. 두어 잔을 거푸 마시자 배가 불렀다. 찾아온 손님에게 차 먹이고, 밥 먹이고, 술 먹여 보내는 것은 이 나라 풍습이다. 정감 넘치는 인심이 우리 옛 시골과 똑같다.

●우리와 똑같은 막걸리·약주 즐겨

 
▲ 토담집: 진흙에 볏짚과 물을 섞어 지은 부탄의 황톳집.우리 시골 재래식 농가 모습과 비슷하다(위). 재래시장: 파로 시내에서 열린 주말 시장의 모습. 상인들은 재래식 저울을 사용,무게를 측정해 고기를 판다.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이나 군침을 흘리고 앉아있는 개의 모습이 우리의 옛 시골 장터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이 부탄의 전통 복장이다(가운데). 대문없는 농가: 부탄 농가의 대문이없는 것도 우리와 같다. 그들도 우리 제주도처럼 나무 막대기를 걸쳐놓고 대문을 대신한다.(아래)
차를 마시자 이번엔 술을 권했다. 부탄의 민속주는 크게 네가지가 있다. 쌀을 증류해 만든, 우리의 청주같은 ‘아라’, 수수나 밀로 만든 ‘신장’, 맥주 비슷한 ‘장’, 쌀을 발효시켜 만든 ‘장게’가 그것이다.

먼저 장게를 청했다. 막걸리였다. 걸쭉한 데다 누런 것이 똑같았다. “우리도 이런 술이 있다. 쌀로 만든다”고 하자 “똑같다”며 깔깔 웃었다. 장게를 마시자 주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술’이라며 ‘아라’를 권했다. 그녀는 “먼저 아무 것도 섞지 않은 ‘그냥 아라’를 마셔보라”고 했다. 제사상에 올리는 약주와 같은 맛이다. 맑은 색하며, 도수하며, 뒷맛까지 똑같다.

“한국에선 이 술을 데워 마시기도 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부탄 사람들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일어섰다. 잠시 뒤 누르스름한 잔을 들고 왔다. ‘아라’를 따뜻하게 데워 거기에 야크 버터를 넣고 계란을 프라이해서 집어넣은 ‘진짜 아라’란다. 색깔이 누르스름한 것은 노른자가 풀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건 자신이 없었다. ‘계란 프라이를 넣은 정종이라.’ 왜 간장은 안 넣었는지 궁금해졌다.

예상대로였다. 비릿하고 찝질했다. 고추장 생각이 간절했다. 참고 잔을 비웠다. 잔 밑엔 계란 건더기가 남았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쪽쪽’ 다 마셨다. 기대에 찬 주인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이제 됐겠지.’ 자신있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주인이 한마디했다. “숟가락 갖다줄까? 계란 떠 먹어야지.”

몇 순배 잔이 오가자 주인이 색다른 것을 권했다. 밤같은 것에 라임을 묻힌 뒤 나뭇잎에 싸서 씹는 ‘도마’라는 것이었다. 부탄 사람들은 ‘도마’를 즐겨 씹는다. “몸을 덥게 해준다”는 이유로 씹는 ‘도마’는 중독성이 강한 데다 마약성분이 있어 약간의 환각작용까지 일으킨다. 오래 씹으면 피처럼 벌건 물이 줄줄 흐른다. 도마를 많이 씹는 사람들은 이가 누렇게 변색되기도 한다.

호기심이 앞섰지만 거절했다. 그러자 주인은 “괜찮다. 나도 씹는다”면서 ‘도마’를 하나 말아줬다. 재차 거절했지만 계속 권했다. 자기도 하나를 씹는다. 옆에 있던 다른 부탄 사람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까짓것, 한번 해보자.’ 도마를 받아 입에 넣고 씹었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잠시 지나자 머리가 멍해져 왔다. 술 기운도 오르는 것 같았고 감각도 무뎌지는 것 같았다. 주인은 “입술이 빨개졌다”며 웃었다. “당신 입도 빨갛다”며 함께 웃었다. 그들은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주인의 남편도 합석을 했다. 얼굴이 벌건 것이 따로 한잔 한 듯했다. 순간 누가 “아빠” 하고 불렀다. 주인의 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자 주인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서로가 서로를 가리켰다. “너희 나라에서도?” “똑같다.” 깔깔대며 함께 웃었다. 기분이 좋아진 주인은 아내에게 “아예 주전자째로 가져오라”고 했다. 뜨끔했다. ‘계란 섞은 아라를, 주전자째로? 이건 아닌데….’

몽골리안 언어의 특징은 목적어가 동사 앞에 온다는 것이다. 서양의 언어가 ‘나는 사랑한다 너를’의 형식인데 반해 몽골리안 언어는 우리처럼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식이다. 강원대학교 주채혁 박사는 “이런 형식의 언어는 명령체계가 뚜렷하고 속도를 필요로 했던 유목권의 언어”라며 “재빨리 대상을 지적해야 했던 필요성 때문에 목적어를 동사나 형용사 앞에 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교수는 “S+O+V형 언어구조는 몽골리안 유목민에게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부탄말은 ‘응아(나) 췌(너) 루(를) 가예(사랑해)’다. 미워해는 ‘미가예’다. 끝말이 ‘예’로 끝나는 것은 경상도 사투리 비슷하다. 우리 말에 존칭어가 있듯이 부탄도 존칭형 어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말끝에 ‘요’를 붙여 존대를 나타내는 것처럼 부탄에선 말끝에 ‘라’를 붙여 존경을 표현한다. ‘가예(사랑해)’에 ‘라’를 붙여 “가예라”라고 말하면 ‘사랑해요’라는 존칭어가 된다.

어른에게 반말을 쓰면 안되는 것도 우리와 같다. 모르는 사람에게 “야”라고 했다간 큰코 다친다. 대답할 때도 “예(우리 발음과 같음)” 또는 “네(〃)”라 해야지, “응(〃)”이라 하면 기분 나빠한다. 어른과 이야기할 때 다리를 꼬고 앉아도 실례다. ‘어린 놈’이 맞담배질을 했다간 불벼락이 떨어진다. ‘전통의 보전’은 부탄 정부의 키워드다. 이 나라에서 외국인의 입국을 연 1만명 이내로 제한한 것도 고유 문화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부탄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들의 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전통문화란 측면에 있어서도 우리와 부탄은 ‘닮은꼴’이다.

동이(東夷)족인 우리가 활쏘기를 즐겼던 것처럼 부탄 사람들도 ‘활’을 즐긴다. 부탄 사람들은 활쏘기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다. 문화적인 공통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탄 사람들도 우리처럼 ‘가면극’을 한다. 사용하는 탈이나 복장도 꼭 조선시대 우리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면극 중간중간 ‘도창’이란 리더가 나와 해설도 하고 연기 지도도 하는 것 처럼, 부탄에서도 ‘아짜라’라는 지도자가 극 중간중간에 나와 해설과 지도를 한다. 관객을 상대로 우스갯 소리를 하는 것까지 똑같다.

차이점이라면 부탄의 ‘아짜라’는 종교 지도자란 점이다. 부탄의 문화보전 정책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이 나라의 복장이다. 이 나라 국민이면 누구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전통복장을 입어야 한다. 부탄의 옷차림은 우리의 개량한복과 똑같다.

남자가 바지 아닌 치마를 입는 것이 우리와 다를 뿐, 모든 국민은 ‘한복’을 입어야 한다. 안내인 잠베이에게 “소변볼 땐 편하겠다”고 하자 “치마만 들면 된다”며 씨익 웃었다. 색동저고리를 연상시키는 이 옷을 입는 것은 국민의 의무다. 다른 옷을 입고 있다 걸리면 300뉼트럼(약 7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벌금이 500뉼트럼(약 12달러)으로 늘어난다. 대졸자 초임이 월 150달러 가량이니 적은 금액이 아니다. 여기에 7일간의 강제노역이 추가된다. 그래도 전통복장을 거부하면 한 달간 구류돼 강제 노동을 해야 한다.

미쓰비시상사에서 근무하면서 부탄에 20번 이상 와봤다는 일본인 미나가와씨는 “부탄 사람들은 전통복장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며 “자신들의 전통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드룩 항공사에 근무한다는 엔지니어 린진씨는 “사람들은 이 옷을 좋아한다”며 “하지만 일부 청소년 중엔 청바지를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 이범진 기자 2002-11-21)

[또 다른 한국, 부탄] 몽골리안 대이동설

알타이 산맥~바이칼 호 주변서 ‘몽골리안’발원
동·서·남으로 갈라져…南 티벳·부탄·미얀마로
 

부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올라가면 티베트, 더 위로 뻗어가면 몽골 우루무치가 나온다. 여기서 위로 더 올라가면 알타이 산맥, 투바 공화국, 부르야트 공화국을 지나게 되고 거기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가 나온다. 거꾸로 시베리아에서 알타이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곧장 내려오면 몽골을 거쳐 부탄과 만난다.

몽골리안 이동사를 연구하는 강원대 사학과의 주채혁 교수는 “지금 몽골 지역 북쪽인 알타이 산맥~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지역이 우리 민족의 원류격인 몽골리안의 발원지란 주장이 학계의 통설”이라며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발원한 우리 선조들이 현 몽골 쪽으로 내려온 뒤 동·서·남으로 갈라져 서진한 무리는 터키 쪽으로, 동진한 무리는 만주를 거쳐 일부는 한반도로 나머지는 시베리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그리고 또 한 갈래는 남쪽으로 내려와 티베트, 미얀마, 부탄 등에 정착하거나 지나쳐 동남아로 퍼졌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가설을 한낱 가설로 치부해 버리기엔 각 지점을 연결하는 ‘문화적 고리’가 심상치 않다. 먼저 서낭당이다. 우리 시골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낭당’은 가설상의 이동루트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형태도 놀라우리 만큼 비슷하다. 커다란 고목나무(또는 기둥)에 울긋불긋한 천이 늘어져 있고 나무 밑에는 돌무더기가 있는 ‘한국식’ 모양새가 국경을 넘어 가로세로로 퍼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 하나 던진 뒤 소원 빌고 지나가는 ‘모양새’도 같고 서낭당이 있는 위치도 같다. 마을 어귀나 주거지 주변 고갯마루에 가면 어김없이 버티고 있다. 들어오는 잡귀를 쫓아 마을을 수호하는 종교적 기능도 같고, 굽어지는 도로나 고갯마루를 넘으면 나타나 긴장감을 주는 것까지도 같다. 몽골리안의 이동루트를 따라 이어져 있는 서낭당이 가정의 안녕이나 자식들의 무병장수, 입신출세를 기원하는 장소이며 민간무속의 중심지란 사실까지도 무서우리만큼 똑같다.

소설가 이윤기씨는 몽골에서 서낭당을 본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그것은 학습을 통한 낯익음이 아니었다. 몽골의 서낭당은 어린 시절 내가 금줄을 두르거나 조약돌을 주워 쌓던 서낭당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서낭당이 존재하는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한 갈래는 바이칼~부탄의 세로선으로, 또 한 갈래는 바이칼~한반도를 잇는 가로선으로 연결된다. 주채혁 교수는 “울란우데에서 부탄에 걸쳐 사는 종족인 코리족의 이름에서 고려가 유래된 것으로 본다”며 “이 지역 사람들의 DNA를 측정해 본 결과 우리와 유사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또 “시베리아 일부에선 곰이 풀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신화가 전해져 오기도 한다”며 “이는 단군신화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몽골리안 루트의 두번째 키워드는 쌀이다. 바이칼~부탄의 세로 노선과 바이칼~한반도의 가로 노선에선 ‘쌀’이 주식이다. 투바 공화국도 부르야트 공화국도 티베트도 부탄도 모두 쌀을 먹는다. 고구려 연구회의 서길수 회장은 “태국 북부에서도 인절미를 먹는다”면서 “이것은 거대한 벼농사 문화권의 흐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주채혁 교수는 “바이칼 호수를 찍은 항공사진에서 수로의 흔적이 발견됐다”며 “이것은 이 지역에서 벼농사가 이뤄졌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몽골리안 지역에서는 광주리·키·조리·절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쌀문화’의 산물들이 쉽게 발견된다.

또 하나의 ‘고리’는 신발이다. ‘몽골리안 이동루트’ 위에 있는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버선코처럼 끝이 쏙 올라온 신발을 신는다. 주 교수는 “이것은 북방계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라며 “우리가 한 핏줄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했다.

‘몽골반점’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도 없다. 말 안해도 안다. 몽골리안 루트 어느 곳을 가든 몽골반점을 찾아볼 수 있다. 윗사람을 공경하는 풍습도 그렇다. 어른이 술을 권할 때 아랫사람은 왼손을 오른손에 대고 공손히 잔을 받는 것은 몽골리안 고유의 ‘전통’이다. 소설가 이윤기씨는 몽골의 술자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몽골인 운전사가 술을 받았다. 오른손을 왼손으로 받치고 공손히 받았다. 그는 오른손 중지로 술을 찍어 하늘로 퉁기면서 나지막하게 “텡그리” 하고 속삭였다. ‘텡그리’는 ‘천신(天神)’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몽골식 ‘고수레’였다.”

● “퉁구스족이 바로 동이 족”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와 똑같은 ‘또 다른 우리’. 이 철저한 유사성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연관성’을 뒷받침해 보려는 학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주채혁 교수는 “우리에게 고향으로 여겨지는 ‘알타이’는 ‘금산(金山)’이라는 뜻”이라면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이름에 나타난 ‘알지’가 ‘알타’일 가능성이 높다. 한자인 ‘금’과 몽골 언어 ‘알타(金)’가 중복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사성은 또 있다. 몽골에는 신성시되는 산이 하나 있다. ‘칭기즈칸이 묻혀 있다’는 이 산의 이름 ‘보르항’은 하느님 혹은 버드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 학계 일부에선 “최남선이 백두산의 옛이름이라고 보았던 ‘불함산(不咸山)’이 ‘보르항’과 같은 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알타이 문화권에서는 무당(巫覡)을 ‘박시’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규경은 자신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남자 무당(男巫)을 뜻하는 의미로 ‘박사(博士)’라는 말을 쓴다”고 적고 있다.

창조역사학회의 김영우 사무국장은 “바이칼 호수와 알타이 산맥 근처에 살고 있던 퉁구스 족, 즉 동호(東胡) 족이 곧 동이(東夷)를 뜻하는 말”이라며 “퉁구스 족에서 돌궐 족과 훈족이 갈라져 나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 국장은 “알타이 산맥에서 서진한 돌궐 족이 투르크, 즉 오늘날의 터키를 세운 민족이고, 북유럽으로 건너가 지금의 헝가리·루마니아·스웨덴 지역에 정착한 훈족이 한때 유럽을 압박했던 흉노족”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으로 이동한 퉁구스 족이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부여·발해”라며 “거대한 역사를 일으키며 인류사를 움켜쥐었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우리의 조상”이라고 강조했다.  

(주간조선 / 이범진 기자 2002-11-21)

[취재파일] 쇄국주의 부탄의 영어 정책 

부탄은 외국과의 관계가 소원한 나라다. 1971년 UN(유럽연합)에 가입하긴 했지만 가입 이후에도 15년간은 ‘사실상 쇄국’의 빗장을 걸고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연 2000~3000명선으로 제한하던 외국 관광객 수를 7000여명으로 늘려 문호를 ‘대폭’ 열었지만 아직도 인도·네팔·태국·미얀마 외에 다른 나라들과는 비행 직항로를 갖고 있지 않다.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늦게 TV방송을 허용한 나라다. 그나마 하루 한 시간씩밖에 하지 않는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1999년 6월 TV와 함께 사용이 허용됐다. 이 나라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500명(2000년 기준). 신문도 타블로이드판 국영 주간지 ‘퀸셀’ 한 가지뿐이다. 문맹률은 무려 58%. 글을 읽고 쓰는 사람보다 못읽고 못쓰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 그것도 ‘꽤’ 잘한다. 직장인·공무원은 말할 것도 없다. 상점·식당·카페 주인은 물론 농민·노점상까지도 영어를 한다. 팀푸나 파로 같은 대도시에 가면 ‘네이티브’에 가까운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별다른 외교관계도 없고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하지 않은 나라. 돈벌이에 아득바득하지도 않고 전통을 고수하며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소박한 불교나라에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답은 이 나라의 교육이었다. 부탄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부탄어(종카어)’ 과목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고 있다. 부탄 역사도 영어로 강의한다. 수업 내용에 대한 질문이나 답변도 물론 영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쇄국을 주장했던 종교국가에서 대체 왜 영어를 공용어로 삼았을까? 부탄의 지배계층은 영국·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 국왕인 ‘왕축’도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지영파’다. 부탄의 사회 인프라는 모두 영국을 본따 이뤄졌다. 전기 콘센트까지도 영국과 같은 모양에 같은 규격, 같은 사이즈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어 공용화’의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방언이었다. 부탄은 작은 나라다. 면적이 4만7000km니까 한반도의 4분의 1이 안되는 크기다. 그런데도 방언이 무척 심하다. 고지대에 산세가 심해 그런지 자기들끼리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 나라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은 것은 궁극적으로 방언문제를 풀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어 공용화론이 주목을 끌었던 적이 있었다. 일부에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공용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었고 또 다른 일부에선 “말이 바뀌면 정신도 바뀐다”며 반대를 펴기도 했다. 찬반 양론을 펼치며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던 우리 국민들은 부탄의 영어 공용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주간조선 / 이범진 기자 2002-11-21)

[부탄 종카語] 문장구조·경어법·높임말 우리와 같아 

아빠는 ‘Apa’엄마는 ‘Ama’…발음구조도 비슷

1. 종카어(Dzongkha)의 약사

부탄의 공식 언어는 종카어(Dzongkha)이고 공식 종교는 불교이다. 처음부터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종카어의 유래가 종교와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는 부탄의 어린아이들.
종카어는 부탄의 위대한 스승으로 알려진 잡드룽 나왕 남게이(Zhabdrung Nawang Namgay)에 의해 1616년쯤에 만들어졌다. 물론 그 전에도 종카어는 부탄에서 쓰이고 있었지만 종카어만의 독특한 글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잡드룽은 티베트(Tibetan) 경전에 쓰인 부처의 가르침을 부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티베트어에서 몇 가지 단어를 뽑아 약간 변형하여 종카어를 만들었다. 따라서 종카어는 티베트어와 발음 면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 종카어는 발음 면을 제외하고는 쓰는 법이나 형태에 있어서 티베트어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종카어는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대부분 승려들만이 종카어를 읽고 쓸 수 있었다. 1971년부터 정부의 적극적인 종카어 보급 정책으로 두 명의 학자가 종카어 문법을 개발하고 일반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종카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은 교육을 받은 부탄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카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종카어는 배우기 쉬운 언어는 아니다. 30개나 되는 자음과 단어마다 별개의 높임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탄의 학교에서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기 때문에 대다수의 학생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 중 하나로 종카어를 꼽는다.

2. 종카어와 다양한 방언들

부탄은 국토가 상당히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언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지리적 영향이 크다. 수도인 팀푸(Thimphu)만 해도 고도가 2000m가 넘는 지역이고 이 외의 지역도 고도 4000m가 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과거에는 오랜 기간 다른 지역과 상호 접촉과 교류가 없이 고립된 지역들이 많았고 방언적 차이들이 심해져서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부탄의 대표적인 방언은 사숍어(Sharchop)이다. 부탄의 동부 지역에서 널리 쓰이는 방언으로 종카어와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이 외에도 각 지역마다 종카어와 비슷한 혹은 전혀 다른 방언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부탄에서 흔히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만나면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때문에 부탄의 모든 공식적인 문서의 경우 대개 영어로 쓰이고 간판이나 도로표지도 대부분 영어와 종카어 2개 국어로 쓰여 있다.

또한 종카어를 사용하는 부탄 사람들은 대개 종카어뿐 아니라 네팔어, 힌디어도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네팔과 인도, 두 나라가 지리적으로 근접한 이유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두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부탄의 국립 신문인 퀸셀(Kuensel) 같은 경우도 종카어, 영어, 네팔어 등 3개 국어로 나온다.

3. 한국어와 종카어의 유사점과 차이점

한국어와 종카어의 유사점을 들라면 우선 어순을 들 수 있다. 구조적으로 두 언어는 모두 주어+목적어+서술동사의 어순을 가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개 문장의 배열순서가 동일한 언어들은 다른 구조적 특징도 비슷하게 마련이다. 글자를 만드는 방법도 두 언어 모두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만든다는 유사점이 있다. 쉬운 예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종카어로는 응아(나)췌(너)루(를)가예(사랑해)라고 한국어와 말의 순서가 똑같다.

두 번째는 경어법이다. 한국어는 세계 여느 언어와 비교해서 특히 경어법이 많이 발달되어 있는 언어 중 하나다. 종카어 역시 웃어른에 대한 독특한 높임말이 있다. 쉬운 예로 인사말을 보면 ‘안녕하세요’를 종카어로 ‘구즈장포(KuzuZangpo)’라고 하는데 웃어른을 대할 경우는 존경의 뜻으로 말끝에 ‘라(la)’를 붙여서 ‘구즈장포라(KuzuZangpo La)’라고 인사한다. 그 외 모든 말도 마찬가지다. ‘감사합니다’라는 뜻인 ‘까딘체(Kadinchhey)’도 ‘까딘체라(Kadinchhey La)’라고 한다. 종카어의 ‘라’는 한국어의 존대를 표현하는 어미 ‘시’ 또는 ‘요’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외에도 종카어는 한국어와 동일하게 단어마다 높임말이 따로 있다. 종카어에는 거의 모든 단어마다 별개의 높임말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국어보다 더 엄격한 말의 구분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높임말에 해당하는 단어를 ‘나’에게는 쓰지 않는 것도 한국어와 똑같다. 가령 한국어에서는 ‘시’ 나 ‘님’이라는 말을 동반해서 존경의 뜻을 표현한다. 또 ‘먹다’란 말의 높임말로는 ‘잡수시다’라고 하고 ‘가다’라는 말은 ‘가시다’라고 한다. 종카어로도 ‘먹다’라는 뜻인 자니(ZaNgi)를 높임말로는 지니(ZhiNgi)라고 하고 ‘가다’라는 뜻인 조니(JoNgi)를 조엔니(JoEnNgi)라고 하며 높임에 해당하는 말을 스스로에게는 쓰지 않는다.

이 밖에도 종카어에는 왕과 연관된 말에 특별한 높임말이 있다. 왕 이름 앞에 얍(Yab), 왕비 이름 앞에는 욤(Yum)이란 말을 쓰는 것 등이 그것이다.

▲ 부탄의 수도 팀푸에 위치한 고등학교 전경. 팀푸 시내에 있는 유일한 고등학교다.
셋째로 두 언어는 발음에 있어 친숙한 단어들이 많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호칭으로 아빠, 엄마라는 말을 종카어로도 비슷하게 아빠(Apa), 아마(Ama)라고 발음한다. 한국어와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종카어의 아빠, 아마라는 의미가 좀더 넓게 쓰인다는 점이다. 한국어로 아빠는 아버지만을 가리키지만 종카어에서는 비록 혈연적 관계가 없을 지라도 모든 웃어른들을 통틀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엄마라는 뜻인 아마(Ama)나 아미(Ami)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친어머니뿐 아니라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모든 사람들을 아마라고 부를 수 있다. 필자 역시 한 달 동안 부탄 가정에서 홈 스테이를 하면서 주인집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아빠, 아마라고 불렀었다. 이 외에도 서로 발음과 뜻이 비슷하거나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다른 말들이 많다. 예를 들면 한국어의 ‘차(tea)’라는 말이 종카어로도 동일하게 ‘차’라고 발음하지만 ‘소금’이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종카어 알파벳 중에 상당수가 한글 알파벳과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있다. 카(Ka) 차(Cha) 자(Ja) 타(Ta) 다(Da) 나(Na) 파(Pa) 바(Ba) 마(Ma) 와(Wa) 아(A) 야(Ya) 라(la) 사(Sa) 하(Ha)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대다수 부탄 학생들은 한국어 발음을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국어와 종카어의 차이점을 살펴본다면 우선 계통적인 차이점을 들 수 있다. 종카어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티베트어에서 유래된 것이라서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고 한국어는 일반에게 알려져 있기로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한국어는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을 가지고 있지만 종카어는 4개의 모음과 30개의 자음이 있다. 그리고 종카어에는 특별한 조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조사는 한국어만의 유일한 특징 중 하나이다. 영어와 같은 인구어(Indo-European language)에서는 ‘I love you’라고 하여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 받는 대상이 어순에 의해 결정된다.

종카어에서는 한국어와 어순은 같지만 각 문장요소를 구별하는 조사가 우리처럼 많지않다. 한국어에서는 어순이 말의 뜻을 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조사의 역할 또한 작지 않다. 어떤 조사를 쓰느냐에 따라서 말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단 부탄 학생들뿐 아니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국어 조사의 다양한 쓰임새를 제대로 배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세 번째로 종카어에는 4가지 성조(tone)가 있다. 물론 종카어는 대표적 성조언어인 중국어처럼 두드러진 성조가 있는 언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엄연하게 구분되는 억양이 있다. 따라서 미묘한 발음과 억양의 차이에 따라 단어의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한국어 역시 장단음이 존재하고 문장 중간에 쉼을 두어서 말토막을 구분하고는 있지만 현대 한국어의 표준발음에는 성조가 거의 사라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종카어의 유래와 한국어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외에도 언어학적으로 연구해서 한국어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자면 얼마든지 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언어뿐만이 아니다. 종카어 노래를 듣다보면 우리나라 전통 민요와 비슷한 약간 단조풍의 음색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의 놀이문화에도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등 동일한 놀이문화가 많고 부탄의 전통의상인 고(Gho·남자의상)와 기라(Kira·여자의상)도 얼른 보기에는 개량한복과 아주 유사한 모양이다. 물론 다른 여러 문화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쉽게 말한다면 부탄은 마치 1950~60년대의 한창 발전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부탄의 수도인 팀푸의 시내를 걷다보면 곳곳에 ‘one nation one people(한겨레 한민족)’이라고 쓰인 간판을 쉽사리 볼 수 있다. 한민족이길 소망한다는 것 외에도 하늘이 허락한 자연 속에서 안연히 살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나라와 부탄은 많은 유사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노은오· 부탄 주재 한국어 강사>

(주간조선 2002-11-28)

[편집장 칼럼] 몽골리안 루트와 한국인

십수년 전인가 미국의 한 박물관에서 에스키모 가족의 흑백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 100년 전 할아버지·할머니 모습과 너무나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다. 이후 미국의 원주민(Native American) 인디언 박물관에서 접한 인디언들의 생활모습에서도 까닭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구전(口傳)된 민속노래(folk song)가, 어렸을 적 우리 시골에서 접한 노동요나 제례요(祭禮謠)와 너무나 흡사했다는 점이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어~어 어~어’로 시작되는 노래는 우리 농촌에서 죽은 사람의 상여를 메고 나갈 때나 입관식을 할 때 부르는 제례요와 100% 같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미국 대륙을 더 내려가 만난 멕시코인을 비롯 중·남미인 중에도 찢어진 눈매를 비롯한 얼굴 생김새, 표정, 동작, 체격이 영락없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 이는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에 이민간 동포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 아르헨티나 동포는 “고산지대에 갔더니 우리와 똑같은 생김새에 생활습속도 비슷한 원주민들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성이 김씨더라”고 전했다.

의문은 몇년 후 풀렸다. 한국인의 원류(源流)인 북방몽골계가 수만년 전 시베리아~베링해협(과거에는 육지)~알래스카~북미~중·남미로 이동하면서 지금 에스키모, 인디언, 인디오들의 조상이 됐다는 연구 자료들을 접하면서였다. 결국 우리 모두는 수만년 전, 지금 바이칼호 부근 어느 곳에서 함께 살았던 조상들의 ‘한 뿌리’ 자손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수많은 세월과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 오면서 많은 변화가 이뤄졌지만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해 비교적 단일혈통과 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듯이 미대륙 혹한지대나 고산지대에서 동화를 거부하고 전통적 삶을 고수한 원주민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기자가 에스키모나 인디언에게서 느낀 동질감은 수만년 전 ‘한뿌리’였다는 동류(同類)의식을 본능적으로 포착한 것이자, 그 장구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수만년 전 조상들의 생활 습속과 유전인자가 지금껏 완강하게 후손들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다.

문화 인류학적으로 몽골지역에서 시베리아 미국으로 뻗어가는 ‘몽골리안 루트’에 관해선 많은 연구가 돼있다. 그러나 지구촌 다른 곳 즉 몽골에서 남진해 티베트 고원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주변으로 펼쳐지고 궁극적으로는 인도양·태평양으로까지 확산되는 또다른 ‘몽골리안 루트’에 관해선 아직 연구가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티베트 역시 우리 북방 몽골계로 언어, 체격, 습속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이곳은 지역적으로 서역·동남아시아를 향한 ‘관문’ 구실을 하는 바람에 여러 종족·문화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 티베트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접하는 네팔의 경우 왕족은 무사계급으로 역시 몽골계다. 네팔 몽골계 중 날래고 산을 잘 타 한국 등반대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세르파족의 경우 단일혈통을 유지한 덕분에 한국인과 매우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

역시 국경을 접한 미얀마는 물론, 동진(東進)해 접하는 베트남·라오스·태국 치앙마이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 사는 고산족들 중에서도 ‘코리안’과 비슷한 몽골족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몽골 반점을 지니고 있고 한복 비슷한 차림에 막걸리를 만들어 마신다. 그들이 말하는 방언에서도 우리 언어와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남부 아시아 지역에서 지금 한국인과 가장 비슷한 종족은 부탄 사람들일 것이다. 이곳은 사면이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자 오지(奧地)로, 다른 곳에 사는 몽골계보다 훨씬 주위 환경에 덜 동화된 채 북부 몽골계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탄과 미얀마 사이 인도 동북부 산악지대에 사는 나가(Naga)족들 역시 우리와 같은 몽골계로 앞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이같은 북방몽골계 연구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몽골인들이 워낙 강인하고 생명력이 질겨 칭기즈칸 시대, 중국의 청나라 시대 등 인류사에 굵직한 족적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그 몽골계 중에서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이들이 바로 한국인이다. 서양인들의 시각이 아니라 바로 한국인의 주체적 시각으로 몽골계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다면 그만큼 우리가 누구냐는 데 대한 정체성·주체성 연구에 한걸음 다가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주간조선 / 함영준 편집장 2002-11-28)

[독자마당]

◈ 부탄언어는 티베트 버마어족

주간조선 특집 “‘또 다른 한국’ 부탄을 가다”(1729~1730호) 기사를 보고 황당한 점 몇가지 적어 보낸다. 부탄어는 티베트 버마어족에 속하며 티베트어와 상당히 유사한 언어이다. 이 언어를 몽골이나 퉁구스 등의 알타이어족과 비교하는 시도는 마치 한국어를 인도 유럽어의 일종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 붙은 탄을 부탄의 탄과 같다라니. 스탄이 land란 뜻의 범어로 알고 있지만 부탄에 가서 부탄이 종카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보고 쓴 기사인지 궁금하다. 단어 몇개 가지고 부탄의 종카어와 우리말의 근연성을 주장하는 논리대로라면 세계에 사촌언어가 아닌 것이 없을 텐데. 차라리 독일어의 Ja 와 충정도의 야(예)의 근연성을 주장하는 게 어떨까. 알타이 제 언어와 우리말의 동계어설도 증거 부족으로 학계에서 확실히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모 및 풍속이 비슷하다고 사촌이라니 어이가 없다.

티베트(부탄)하고 우리가 언어적·문화적·인종적으로 근거도 없는 근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라고 밖에 안 보인다. 몽골리안 쇼비니즘을 전파하려고 별 말도 안되는 소리 다 갖다 붙인다고 밖에는…. <익명의 독자>

부탄의 옛 이름은 ‘바오 탄’입니다. 여기서 ‘바오’는 높다(high)란 뜻이고 ‘탄’은 땅(land)이란 뜻입니다. 다시말해 바오탄, 즉 부탄은 ‘높은 곳에 있는 땅’을 뜻합니다. “부탄에 가서 부탄이 종카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보고 쓴 기사인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이 설명은 부탄에 가서 부탄 정부의 설명을 듣고 그것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부탄어와 티베트어 사이엔 상당한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어는 구조적으로 몽골어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몽골어는 다시 한국어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까지 언어분류로는 부탄어와 티베트어는 티베트·버마어족에 속해있고, 몽골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해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나눈 어족분류가 과연 100% 정확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 것입니다. 우선 알타이어계의 특징이라면 SOV형 언어구조와 조사의 사용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똑같이 SOV형 구조를 갖고 있고 조사를 사용하고 있는 부탄 언어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 말일까요? SOV가 아닌 SVO형 구조를 갖고 있고 조사가 아닌 전치사를 사용하는 서양인들의 어족분류를 과연 100% 확실한 것이라 믿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또 부탄어를 티베트·버마어족으로 나눈 서양학자들이 과연 당시 우리의 한국어나 몽골계통의 언어 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런 분류를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화두를 던져보는 것도 이번 취재의 목적 중 하나였습니다.

관심있게 기사를 읽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주간조선 / 이범진 기자 2002-12-5)

[부탄] “히말라야의 고구려”…우리와 같은 세시풍속

“홀수는 양(陽)의 상징, 짝수는 음(陰)의 상징”

부탄(Bhutan)은 인도와 중국(티베트) 사이에 위치해 있는 히말라야의 불교 왕국이다. 흔히 우리는 히말라야의 네팔(Nepal)은 잘 알고 있지만 네팔의 인접 국가인 부탄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부탄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조금 익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다름 아닌 ‘부탄(butane) 가스’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억측임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의 평화스러운 왕국인 부탄은 혹시 부탄 가스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 참으로 다양한 오지 여행기가 출판되었지만 유독 부탄에 대한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부탄은 우리의 관심에서 거의 소외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서 히말라야의 깊은 산중에서 개방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부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는 노력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 부탄의 수도 팀푸에서 열린 주말시장의 풍경. 광주리에 배추를 담고, 고추를 널어 파는 모습이 우리 시골 장터와 유사하다.
사실 우리가 굳이 부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도 없다. 다만 아시아에 위치해 있는 부탄에 대해서 이제는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세계화라는 말이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일부 선진국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다양한 지구촌의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민속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더욱이 아시아에 속한 우리가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의 문화와 민속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문화와 민속을 이해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다. 자신과 이웃한 민족의 구성원들을 잘 모르면서 외지에 가서 외지인들과 잘 어울릴 수는 없는 일이다.

●티베트와 달리 ‘한국식’으로 절

부탄은 아시아의 여러 민족 중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부탄의 문화와 민속은 티베트(Tibet)와 거의 유사하다고 말하지만 부탄은 티베트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문화와 민속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부탄인들이 종교적인 생활 속에서 절을 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부탄인들이 불교사원에서 절하는 것을 보면 티베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인 ‘오체투지(五體投地)’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마치 한국인들이 종교적인 제의를 행할 때 하는 일반적인 절을 연상시킨다. 다만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절을 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기 전에 두 손을 모아서 머리, 입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슴에 살며시 댄 후에 절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부탄인들에 의하면 머리, 입, 가슴에 두 손을 모아서 갖다 대는 것은 마음, 말(言), 신체가 각각 혼연일체가 되게 정성을 들여 기도를 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히말라야의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엄격한 의미에서 티베트의 문화와는 구별되는 부탄은 한국과도 제법 많은 문화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입장에서 그리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민족이 가지는 문화적인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만을 우선 기술할 수 있다.  

 
▲ 부탄식 서낭당이라 할 수 있는 '초텐'의모습. 부탄 사람들은 초텐 옆에, 우리 서낭당 주변과 마찬가지로 작은 돌멩이를 모아 돌탑을 쌓기도 한다.
첫째 부탄인들이 숫자를 세는 방식은 왼손부터 오른손으로 셈한다. 즉 왼손의 새끼손가락부터 엄지손가락까지 셈한 후에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셈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각 손가락에 있는 마디를 계산하게 되는데 손바닥의 안쪽에 있는 마디부터 밖으로 세게 된다. 새끼손가락부터 집게손가락까지는 각 손가락의 마디가 네 개이며, 엄지손가락은 마디가 세 개인 셈이다. 따라서 새끼손가락으로부터 엄지손가락까지 마디는 모두 열아홉 개이며, 왼손에서 오른손까지 한번 셈하게 되면 서른여덟 개의 수(數)를 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탄인들이 셈하는 방식은 왼손으로부터 오른손으로 셈하여 가는 것이 특이하다. 즉 셈하는 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는데, 이러한 요소는 한국의 민속에서도 일부 엿볼 수 있다. 즉 한국의 민속에서 동쪽은 좌청룡(左靑龍)이라고 하여 ‘왼쪽’이고 서쪽은 우백호(右白虎)라 하여 ‘오른쪽’을 나타낸다. 그런데 동쪽인 왼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인 오른쪽으로 진행하는 민속이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가령 한국의 민속에서 방향에 따라서 손(損)의 유무를 따질 때 흔히 음력으로 동쪽에는 1, 2일에, 남쪽에는 3, 4일에, 서쪽에는 5, 6일에, 북쪽에는 7, 8일에 손이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음력으로 매달 9, 10일에는 손이 없다고 해서 이사를 한다든지 못을 박아도 된다는 속신(俗信)이 지금도 공공연히 믿어지고 있다.

여기서 각 방향에 손의 유무를 따질 때 동쪽인 왼쪽에서 시작하여 남쪽, 서쪽인 오른쪽 그리고 북쪽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탄이나 한국에서 해(日)가 뜨는 동쪽 즉 왼쪽에서 시작하여 해가 지는 서쪽 즉 오른쪽으로 진행하는 민속적인 요소가 일상적인 생활 속에 남아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두 민족이 가지는 문화적인 동질성을 잘 암시해 주기도 한다.

 
▲ 입시철의 한국 학부모의 모습?아니다.뭔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부탄의 아낙이다. 부탄 사람들은 팔,무릎 등 온몸을 땅에 대는 '오체투지'대신 두 손을 모으고 비는 '한국식'절을 한다.
둘째 부탄인들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인생의 과정 중에서 혼인이나 승진과 같은 기쁜 경우에는 홀수의 선물을 하고 장례와 같은 슬픈 경우에는 짝수의 선물을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의 민속에서 인식되고 있는 홀수와 짝수의 의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세시풍속에서 홀수는 양(陽)을 상징하고 짝수는 음(陰)을 상징한다. 따라서 세시풍속 중에서 명절은 대부분 양(陽)의 기운이 겹치는 날로 정해져 있는데 설날(1월 1일) 정월대보름(1월 15일) 삼짇날(3월 3일) 단오(5월 5일) 칠석(7월 7일) 백중(7월 15일) 추석(8월 15일) 중양절(9월 9일) 등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왼 새끼’ 금줄 문화와 유사

셋째 부탄에는 머리가 돼지 모양이고 몸은 사람 형태인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대체로 늦은 밤에 혼자 길을 가게 되면 이러한 귀신을 만나게 된다고 부탄 사람들은 믿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귀신에 대항하기 위해서 부탄인들이 대비하는 방법이 특이한 편이다. 즉 늦은 밤에 홀로 길을 가게 되면 부탄인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끝 부분을 일부 뒤집어서 안쪽이 바깥쪽으로 나오게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귀신을 만나더라도 귀신이 놀라서 도망가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형식과 반대되는 방법으로 귀신을 쫓는 방법이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의 민속에도 오른 새끼줄과 대비되는 왼 새끼줄 문화가 있다.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금줄 문화가 바로 그것인데 일상적인 오른 새끼를 비일상적인 왼 새끼로 만들어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역신을 막았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분적이긴 하지만 부탄인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 쉽게 볼 수 있는 민속적인 일부 요소가 한국과 매우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산스크리트어로 부-우탄(Bhu-Utan)이라는 용어가 ‘높은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국명을 고구려(高句麗)로 명명하면서 고구려인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높고 아름다운 땅’과 무슨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기개로 볼 때 ‘높다’라는 상징이 단지 해발고도가 3000미터에도 못 미치는 백두산이 아니라 7000미터 이상의 산들로 즐비한 히말라야에까지 미치지 않았을까 한다.

<박환영 /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

(주간조선 200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