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로 선보인 십이대영자 청동 유물

1958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자오양현(朝陽縣) 남서쪽 약 12.5km 지점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라는 곳에서 무덤 2기가 공사중에 발견됨으로써 랴오닝성박물관을 중심으로 정식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조사과정에서 무덤 1기가 추가로 발견됐다. 먼저 발견된 무덤은 2,3호분으로 명명됐으며 나중에 확인된 무덤이 1호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무덤들 중 1호분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땅을 2m 가량 파고 내려가 구덩이를 만든 다음 바닥에는 자갈을 깔고 부부로 판단되는 남녀 시신 한 쌍과 부장품을 안치했으며 넓은 판돌로 천장을 덮었다.

부장품 중에는 잔무늬 구리거울(다뉴세문경)이 있었고 시신의 가슴팍에서는 비파형 동검 두 자루가 발견됐다.

같은 합장분으로 판단되는 2호분에서도 비파형 동검과 잔무늬 구리거울이 나왔으며 3호분 또한 잔무늬거울을 출토했다.

중국 요서(遼西) 지역 청동기문화 조명에서 일대 획을 이룬 이 십이대영자 발굴 성과는 1960년대에 발굴보고서가 간행됨으로써 국내외에 널리 소개됐다.

남한에서 이 유적발굴 성과는 고 김원룡 당시 서울대 교수가 1961년 「역사학보 」 16호에 '십이대영자의 청동단검묘-한국 청동기문화의 기원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공개했다.

김 교수가 십이대영자를 주목했던 까닭은 이곳 출토 유물이 한국 청동기문화와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파형 동검과 잔무늬거울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고루 출토되고 있었다.

십이대영자는 발견 초기에는 기원전 6-5세기에 해당하며 이를 남긴 주체는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북방 오랑캐 중 하나인 동호(東胡)라는 견해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1980년대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축조 시기는 춘추시대 초반기(대체로 기원전 8세기)로 상향조정되는 한편 이것을 남긴 주인공 또한 동호족이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주장이 중국학계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고조선 중심지가 요서를 중심으로 한 만주인가, 평양 중심의 한반 도인가 하는 해묵은 논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문화를 전공하는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십이대영자 유적이 동호족 유산으로 보고된 1960년대만 해도 고조선 중심지는 평양설이 우세 했으나 고조선 유적이라는 견해가 등장하면서 '고조선 요서지역 중심설'이 다시 힘 을 얻게 됐다"고 지적했다.

십이대영자 유물은 이처럼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나 정작 그 실물을 구경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고 김원룡 교수도 일본을 통해 입수한 중국의 발굴 보고서로만 이 곳 유물을 보았을 뿐이다.

중국이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십이대영자 유적과 그곳 출토 유물은 접근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한데 이러한 십이대영자 유물이 천만 뜻밖에도 국내에 들어왔다.

경기도가 중국 랴오닝성, 일본 가나가와현(神奈川縣)과 공동으로 경기도박물관( 관장 양미을)에서 개최하고 있는 특별전 '동(同)과 이(異)'에 십이대영자를 대표하는 잔무늬거울과 비파형 동검이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24일 개막돼 이달 21일이면 폐막하는 이번 특별전은 뿐만 아니라 좀처럼 만나기 힘든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실체를 복제품이 아닌 실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월드컵으로 들뜬 분위기를 문화적으로 순화시킬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의 중요성을 감안, 전시기간을 연장하는 방안을 중국측과 협의중이다.

(연합뉴스 200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