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東아시아 역사의 수수께끼를 푼다 : 金

北方草原의 기마軍團, 中原·한반도· 日本열도로 大南征 !

신라 사신 衛頭와 전진 황제 符堅의 대화

필자의 말 <張漢植 / 한국방송공사 보도국 TV 편집부 기자>
   
이 글은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한국 金氏의 혈관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9월호에서 나는 한국 金氏의 뿌리는 흉노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선비족 모용씨, 구체적으로는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낙오한 前燕(전연) 군대의 일부라는 가설을 전개했다. 이번에는 눈을 동북아시아 전체로 넓혀 「김씨의 조상은 선비족 모용씨」라는 주장이 역사적 타당성이 있음을 입증해보고자 한다.
 
사실 동북아시아의 4세기는 한·중·일 3국의 민족 地形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사상 유례없는 대격변의 시대다. 유교에 기반한 체면문화는 이 즈음 잠시 그 빛을 잃고 오로지 힘과 무력으로써만 正義(정의)가 결정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런 만큼 역동성이 넘치던 때이기도 하다.
 
중원 땅에서는 이른바 「5胡(호) 16國(국) 시대」가 전개되고 있으니 만리장성 이북에 살던 다섯 種의 기마·유목 민족이 北중국을 정복해 권력을 누린 시절이다. 같은 시기 한반도의 남단 신라·가야와 일본열도에서도 기마족의 문화가 활발히 발견되고 있으니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강물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확산되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중원을 뒤흔든 기마족의 정복활동이 한반도와 일본이라고 피해갈 리 없었을 것이란 시각이다.
   
내물왕 26년, 서기 381년 신라는 중국 북방을 정복해 통치하고 있던 유목민족 국가 前秦(전진)에 사신을 보낸다.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 땅을 거쳐 전진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前秦은 351년 티베트계 族(저족) 출신 符健(부건)이 세운 나라로 381년에는 부건의 조카 符堅(부견)이 황제 位(위)에 있었다. 이 때의 신라 사신 이름은 衛頭(위두). 변방 소국의 외교관이었던 그가 당대 동아시아 최강의 나라 전진의 황제를 직접 대면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이채롭다. 수만리 떨어진 동방의 나라에서 찾아왔다는 점이 황제의 호기심을 부추긴 탓이리라. 다음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전진의 황제 符堅과 신라 사신 衛頭 간의 대화내용이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전후 사정을 보면 위 기록의 대화에 앞서 위두는 부견에게 『해동 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크게 달라졌다』고 자랑스럽게 설명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부견이 그게 무슨 말인고 하고 물었고 위의 기록대로 위두가 신라에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큰 변화가 이뤄졌다고 답한 것이다.
 
이 문답에 대해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신라가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자신에 찬 답변이라고만 풀이해 왔다. 하지만 이 정도의 해석만으로는 부족하다.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변화」라는 위두의 언급이야말로 4세기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한 핵심적 문구로 봐야 한다. 4세기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그같은 혁명적 변화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의 원래 출처는 중국측 역사서인 秦書(진서)이다. 그러므로 위두가 밝힌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은 위두가 즉흥적으로 지어낸 문구라고 볼 수 없다. 당시 前秦(전진)을 비롯한 북중국 일대에서 흔히 통용되던 政治修辭(정치 수사)적 용어로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4세기에 일어난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무엇을 말하는가?
 
4세기가 열리자마자 匈奴(흉노)와  (갈), 羌(강), (저), 鮮卑(선비) 등 다섯 유목민족은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胡族(호족)의 나라 16개를 차례로 세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5胡 16國 시대」다. 이를 두고 훗날 漢族(한족) 역사가들은 「다섯 오랑캐의 폭정 시대」로 규정했지만 당사자인 「5胡」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名號改易」이 이뤄진 「변혁의 시대」인 것이다. 자신들의 전통에 부합되는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고 천대받던 오랑캐에서 漢族(한족)을 지배하는 귀족·장군이 되었으니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부를 만도 하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정치적 입장 차이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짓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어쨌든 위두와 부견의 대화에서 당시 북중국에서는 기마족의 中原 정복과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변화를 「시대변혁·명호개역」으로 표현하며 정당시했음을 알 수 있고 신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사건, 즉 기마족의 정복과 왕위 찬탈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먼저 4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시대변혁, 즉 5胡 16國 시대가 도래한 사정을 알아본다.
 
匈奴族과 漢武帝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 이후 역대 漢族 정권에게 있어 최대의 외적은 북방의 匈奴(흉노)였다. 秦 始皇(진 시황) 시절부터 달나라에서도 관측된다는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도 흉노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만리장성의 길고 높은 성벽으로도 중원의 풍요로운 物産(물산)을 손에 넣고자 바람같이 달려드는 흉노 기마군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흉노의 말이 살찌는 天高馬肥(천고마비)의 계절 가을만 되면 漢族은 매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漢族이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41년 漢나라 武帝(무제)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기원전 200년 고조 劉邦(유방)이 32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冒頓(묵특) 선우가 거느린 30만명의 기마弓兵에게 참패한 이후 漢나라는 매년 흉노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며 살아왔다. 그러나 괄괄한 성미의 武帝는 60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對(대)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으로 나섰다. 흉노 서방의 국가들에 대한 정보수집과 흉노에 대한 공동전선 구축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기원전 139년 張騫(장건)을 서역의 月氏國(월지국·지금의 중앙아시아)에 파견한 일은 비단길(실크로드) 개척과 관련해 잘 알려져 있다.
 
사실 武帝가 즉위했을 즈음, 漢나라는 흉노가 소유한 우수한 철제무기를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상태였고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적인 기병 전술과 군대 편제도 상당히 습득한 상태였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니 흉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武帝는 기원전 129년 이후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衛靑(위청)과 去病(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침공하게 했다. 10년간의 漢匈(한·흉) 전쟁으로 漢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극심했다.
 
예컨대 기원전 119년 고비사막에서 벌어진 흉노의 伊穉斜(이치사) 선우와 곽거병 군대 간의 전투에서 쌍방은 각각 8만명 내지 9만명의 군사를 잃었다. 漢나라가 14만 필의 말 가운데 11만 필을 잃었다니 흉노의 피해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漢 무제의 흉노 정벌전은 흉노에게 더 큰 타격을 입혔다. 당시 흉노의 전체 인구는 1백만에서 1백5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0년 전쟁 동안 전체 인구의 15~20%에 이르는 20만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부상으로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여기에다 흉노의 목축경제를 떠받쳐온 양과 소, 말 등 수많은 가축들이 漢나라 군대에 의해 노획되거나 전투 와중에 달아나 버렸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에 처하게 되자 흉노의 일부 무리는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집안에 「호랑이 새끼」 끌어들인 격
 
 
漢 武帝는 흉노를 짓밟은 여세를 몰아 서기전 108년 「흉노의 왼팔」로 불릴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고조선(「漢書」 韋賢傳은 무제의 고조선 정복을 두고 「흉노의 왼팔을 자른 셈」이라고 적고 있다)을 공격해 멸망시키고는 그 땅을 쪼개 4개의 郡(군)을 설치하니 漢四郡(한사군)의 시작이다.
 
漢 무제의 토벌전 이후 흉노는 4분5열하면서 시름시름 약화돼 갔다. 잠깐잠깐 힘을 키워 漢나라 조정을 압박하기도 했지만 과거의 영광은 되살릴 수 없었다. 예컨대 支 單于(질지 선우:BC 56~36)가 현재의 카자흐스탄 땅인 탈라스 강변에 도성을 정하고 서쪽으로 터키 부근까지 영토를 넓힐 정도로 힘을 키워 漢나라에 대항하자 漢나라는 서기전 36년 7만 대군을 동원해 질지의 도읍을 함락시키고는 질지 선우 등 지배층 1천5백18명을 살해하였다.
 
기원 후 48년에는 선우 位(위) 승계권을 놓고 다투던 우현왕 比(비)가 사정이 여의치 못하자 남부 8개 부족을 이끌고 後漢(후한)에 나라를 바치니 이것이 南匈奴(남흉노)다. 흉노는 이후 漢나라에 항복한 남흉노와 자주성을 견지한 북흉노로 분단되기에 이르렀다. 흉노의 항복에 기분이 좋아진 後漢 조정은 남흉노로 하여금 만리장성 남쪽에 거주하도록 허용하였다. 남흉노는 後漢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매년 왕자를 인질로 보내는 등 정치적으로 漢나라의 신하가 됐고 문화적으로도 중국문화를 수용했지만 고유의 유목전통을 버리지는 않았다. 남흉노가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은 서기 216년의 일이다.
 
後漢이 남흉노를 만리장성 남쪽에 들어오게 한 것은 전통적인 以夷制夷(이이제이) 정책에 따라 남흉노로 하여금 북흉노를 막게 하려는 조처였지만 이는 단견이었다. 이것이 胡族(호족)의 중국 진출 단초가 됐으니 漢族의 입장에서는 집안에 「호랑이 새끼」 내지 「트로이의 木馬」를 끌어들인 격이었다.
 
중국 內地(내지)로 들어온 남흉노의 무리는 漢族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 중국의 농민들은 이때 성안 도시에 거주하면서 성 밖의 농지를 경작하며 생활했다. 성과 성 사이에는 빈 터가 많았으니 흉노족은 이 빈 땅에다 천막을 치고 양과 소, 말을 방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흉노족이 중국 내지로 들어가 사는 것을 지켜본 族(저족)이나 羌族(강족) 등 다른 유목민족 가운데서도 슬금슬금 중국 땅으로 들어가 가축을 방목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황량한 북방 초원지대보다는 中原 땅이 더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 지방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추장, 單于(선우)를 군장으로 받들고 부족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역시 天子(천자)의 신하로 간주됐기 때문에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중국 황제와 부족의 선우에게서 이중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수시로 使役(사역)에 동원돼야 했고 특히 전쟁이 났다 하면 말 잘타고 활 잘쏘는 재능 때문에 즉시 용병으로 차출됐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전쟁에 동원돼 피를 흘려야 했지만 전공을 세우더라도 용병 신세인 만큼 제대로 보상이 있을 리 없었다. 胡族의 선우들은 전쟁에 참가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어떻게든 피해보려 했지만 정면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胡族의 궐기
   
특히 삼국시대가 전개되고 曹操(조조)가 북중국의 패권을 잡은 뒤부터 胡族에 대한 조정의 압박은 가중되었다. 흉노 등 胡族에게도 漢族과 동일한 세금을 징수하고 노역을 부과했던 것이다. 목축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胡族들인 탓에 과중한 부담을 이기지 못해 漢族 대지주의 노예나 농노로 전락하는 무리가 점점 늘어났다. 대초원에서 자유롭게 말 달리던 유목민족들이 농사일을 하자니 체질에 맞을 리가 없었고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 보수도 漢族보다 낮았다. 漢族의 인종적 차별과 멸시, 핍박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불만은 곧바로 반란으로 표출되기 일쑤였다.
 
외국인 노동자라 할 胡族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고 전쟁에 자주 동원되는 것, 漢族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는 데 대해 지각있는 지식인들은 점차 불안감을 갖게 됐다. 晋(진)나라 때 江統(강통)·郭歆(곽흠) 등은 胡族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면서 국경 밖으로 이주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胡族을 용병으로 동원하고 부역을 강요하는 일은 갈수록 늘기만 했고 그 결과는 삶에 지친 胡族들의 대궐기로 나타났다. 胡族 궐기의 직접적 계기는 부패한 晋(진) 조정에서 일어난 「8王(왕)의 난」이었다.
   
「8王의 亂」과 5胡 16國 시대의 도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어보면 이 즈음의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쉽다. 曹操(조조)의 아들 曹丕(조비)가 서기 220년 후한 獻帝(헌제)로부터 황제 位를 선양받는 형식으로 漢을 멸망시키고 魏(위)나라를 세웠지만 그 후손들은 司馬懿(사마의:사마중달로 유명하다. 죽은 제갈공명에게 혼이 난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실은 전쟁이나 정치하는 재주가 뛰어났다)에게 실권을 빼앗긴다. 사마씨가 정권을 좌지우지하다 서기 265년 사마의의 손자 司馬炎(사마염)이 위나라 元帝(원제)로부터 황제 위를 넘겨받으니 바로 晋나라 武帝이다.
 
무제 사마염은 명군이었지만 후계자 선정에서 실패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惠帝(혜제)는 한참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기근이 천하를 덮쳐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다는 보고를 듣자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저능아가 막강한 황제 位를 차지하자 그 일족들은 불안한 마음과 설레는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서기 300년이 되면서부터 楚王(초왕) 司馬瑋(사마위), 汝南王(여남왕) 司馬亮(사마량), 趙王(조왕) 司馬倫(사마륜) 등 王號(왕호)를 갖고 있던 혜제의 일족 8명이 차례로 亂(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가 뒷사람의 칼에 맞아 죽기를 여덟 차례 반복하니 이를 일러 「8王의 亂」이라 부른다.
 
이 8王의 亂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武力(무력)은 북방 출신 胡族들의 기마군단이었다. 진나라 왕실의 8왕과 그 수하들은 흉노족이나 선비족 등 유목민족을 경쟁적으로 자신의 무장 세력으로 삼아 활발히 內戰에 동원했던 것이다. 적은 비용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胡族의 군대는 인기가 높았다. 8王의 亂은 장장 16년간이나 지속된다.
 
內戰이 장기화되면서 천하를 주름잡던 황실의 실력자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죽는 일이 다반사로 되자 유목민족들은 晋나라 조정을 시시하게 생각하게 됐다. 특히 유목족의 추장들은 스스로를 용병 대장으로 만족하지 않고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꿈까지 꾸게 되었다. 『싸움 잘하는 사람이 임금이 된다면 漢族 친구들보다는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이 점은 로마제국 말기 서유럽에서 벌어진 상황과 비슷하다. 게르만족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476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8王의 亂으로 晋나라 조정이 통제권을 상실하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만리장성 이북에 자리잡고 있던 유목민족, 즉 胡族의 큰 무리가 본격적으로 장성을 넘어 들어와 제각기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북중국은 「5胡 16國 시대」라는 격랑으로 끌려 들어갔다.
 
중원 땅에서 가정 먼저 궐기한 胡族은 역시 흉노족이었다. 남흉노의 후예로서 흉노의 좌현왕을 자칭하던 劉淵(유연:흉노의 후예가 劉氏 성을 취한 것은 흉노가 대대로 漢나라 황실과 통혼하였을 뿐 아니라 후한에 항복할 때 형제의 인연을 맺은 점을 내세운 것이다)은 서기 304년 흉노 여러 부족의 추대를 받아 大單于(대선우)에 올랐다. 순식간에 5만의 군대를 모았고 左國城(좌국성:지금의 산서성 일대)을 수도로 삼고 국호를 漢이라 정하고는 정복전을 힘차게 펼쳐 순식간에 북중국 일대를 석권했다.
 
晋나라 조정의 군대숫자는 유연의 무리보다 훨씬 많았지만 제압할 수 없었다. 8王의 난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흉노의 전쟁 기술이 뛰어났고 漢族에 복수하겠다는 전투의지가 강했던 까닭이다.
 
유연의 뒤를 이은 아들 劉聰(유총)은 310년부터 313년 사이 장안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는 晋의 황제를 사로잡는다. 이로써 晋은 멸망하고 황족 司馬睿(사마예)가 317년 양자강 남쪽 「건강」(지금의 南京)으로 달아나 새로이 나라를 세우니 東晋(동진)이다.
 
기마족의 한반도 남부 진출
   
양자강 이북에서는 이때부터 1백35년간 흉노, , 鮮卑, , 羌의 다섯 유목민족이 13개의 왕조를, 유목족에 부용했던 漢人(한인)이 3개의 왕조를 세웠다가 망했다를 되풀이하는 5胡 16國 시대가 전개된다.
 
5胡 16國 시대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두 번 다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격변의 시대였으니 하루아침에 왕조가 흥하고 망하기를 되풀이했다. 힘을 일으키면 누구나 황제가 되고 전쟁에서 지면 그날로 나라가 망하는 약육강식의 5胡 16國 시대는 304년에 시작돼 439년 선비족 拓跋氏(탁발씨)가 세운 나라 北魏(북위)가 중국 북부를 통일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대를 일러 중국의 漢族 역사가들은 「치욕스런 폭정의 시대」라고 불렀지만 당시 유목민족의 나라에서는 위두와 부견의 대화에서처럼 「시대변혁·명호개역」이 이뤄진 혁명의 시대라고 자부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한반도 남부로 눈을 돌려보자. 중국 晋나라의 학자 陳壽(진수)가 편찬한 「三國志 魏志 東夷傳(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3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三韓(삼한)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쪽에 마한 50개국이 있고 동쪽에 진한과 변한 24개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三韓 74개 부족국가를 영도하는 것은 마한의 目支國(목지국)이라고 나온다.
 
김부식의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2세기 중반인 서기 167년에 「신라」가 2만8천명의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반해 진수의 三國志에는 3세기 후반까지도 百濟, 新羅라는 국호는 보이지 않고 마한에서 伯濟國(백제국)이, 변·진한에서 斯盧國(사로국)이란 소규모 부족국가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한반도 남부의 상황을 꽤나 후진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삼국지에 대해 다소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린이의 앞 이마를 돌로 눌러 편편하게 한다는 변진의 편두풍습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고 변진에서 철이 많이 난다는 기사가 사실에 부합되는 점 등에 비춰볼 때 삼국지 기사의 신뢰성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즉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三韓이 3세기 후반까지 부족국가 연맹체 단계였다는 것이 현재까지는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의 사정은 급변하고 있다. 三韓은 사라지고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먼저 백제를 보자. 백제 역사는 346년 근초고왕이 등장하면서 이전과 획기적으로 달라진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최고의 강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를 정신 못차리게 몰아붙일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보여준다.
 
서기 369년 9월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인 雉壤(치양)이란 곳을 침공한 2만명의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5천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뒀다. 기세가 오른 근초고왕은 그해 11월 한강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을 열었는데 모두 황금색 깃발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황금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2년 뒤인 371년에는 정예군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해 고국원왕을 죽이기까지 한다. 근초고왕을 뒤이은 아들 근구수왕은 377년 3만명의 정병을 이끌고 평양성을 또다시 공격할 정도로 백제의 국력이 왕성하였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356년 내물왕 즉위 이후 신라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고대국가의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 보이고 있다. 삼국지에 실린 3세기 후반의 진한연맹과는 판이한 행적이다. 가야는 문헌 기록이 워낙 불비해 그 모습을 제대로 그려보기 힘들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 변한의 옛터에서 북방 기마민족風(풍)의 무기류와 마구류가 4세기 이후 「갑자기」 그것도 「대량으로」 출토된다. 4세기경 변한(=가야) 땅에 강력한 기마군단을 보유한 정치 집단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국가발전은 그 속도가 대단히 느린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도 마한의 맹주국 목지국의 영도하에 있던 伯濟가 불과 60~70년 사이에 百濟란 이름으로 고구려를 능가하는 정복국가로 발전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또 진한의 작은 부족국가 斯盧(사로)가 신라라는 모습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변한(=가야) 지역에서 기마족의 마구류와 치명적 살상력을 지닌 중형 무기들이 갑자기 출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사학계는 이같은 의문에 대해 지금껏 시원스런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백제의 급속한 발전 배경에 대해서는 기마문화에 익숙했던 부여계의 진출과 관련지어 보는 시각이 없지 않았지만 신라는 토착세력의 자기 발전의 결과로 보는 주장이 우세하였다. 낙랑과 대방군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타도되고(서기 313년 경) 백제 근초고왕이 활발한 정복전을 펼치자 경상도 지역의 소규모 부족국가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통합이 가속화되지 않았겠느냐는 정도였다.
   
백제 근초고왕, 왜 辰韓은 정복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4세기 중반쯤 고구려가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국가통치 체계가 흔들리는 틈을 타 북방 기마족의 한 무리가 진한·변한 지역으로 진출했고, 이것이 변·진한 사회를 해체하고 한 단계 높은 고대국가로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3세기 후반까지 이름 없는 부족국가로 지내던 사로국이 4세기 중엽 이후 갑자기 영역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기마족의 정복이란 외래변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쯤부터 조성되기 시작하는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라는 흉노風의 묘제와 그 속에서 발견되고 있는 융성한 기마문화의 유물들이야말로 그 증거품에 다름 아니다. 4세기경에 고구려 땅을 뚫고 내려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마족으로는 「흉노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모용 선비」 외에는 달리 거론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月刊朝鮮 9월호와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풀빛출판사)」에서 상술한 바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백제의 최대 정복군주는 근초고왕이다.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황해도, 남으로는 전라북도, 동으로는 춘천 일대까지를 백제의 영역으로 집어넣고 마한을 영산강 유역으로 몰아붙였다. 근초고왕의 정복전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마한 제국이 보병전 단계에 머물고 있었던 데 비해 백제군은 기마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던 때문이란 주장이 많다. 이와 관련해 최근 백제사 전공자들 사이에는 근초고왕 집단이 만주 땅 부여 부근에서 활동하다 한강 유역으로 진출했을 것이란 주장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만주는 본디 농사와 목축이 동시에 행해지는 半農半牧(반농반목)의 땅, 이곳에 거점을 둔 부여나 고구려 등은 완전한 기마민족은 아니었지만 기마문화가 상당히 흥성하였다. 고구려 군의 편제를 보면 언제나 보병과 함께 기병이 등장하는 것이 그 성격을 말해준다 하겠다. 근초고왕 이후의 백제 지배층이 가져다 준 문화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3세기 후반까지 馬韓(마한)이라는 느슨한 연맹체가 지배하던 영역에 4세기 중반 이후 백제라는 강력한 정복국가가 출현하는 배경에는 기병군단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한반도 중부 이남을 순식간에 아우르고 북방의 강대국 고구려를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근초고왕이 왜 한반도 동남단의 진한 땅은 정복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소백산맥은 기마 부대가 넘지 못할 정도로 험준한 산맥이 결코 아니었다. 또 서울과 경주 사이의 거리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의 일이지만 馬夫太(마부태)가 거느린 청나라의 선봉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보름 만에 한양에 육박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서울 근방에 터를 잡고 있던 근초고왕이 진한을 정복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열흘 안에 경주 땅에 기마군단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 三韓 영역을 어렵지 않게 통합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복군주 근초고왕이 진한 연맹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근초고왕은 진한 연맹을 정복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진한을 대신한 신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북방 고구려와의 전쟁국면에서 동부전선의 부담을 없애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근초고왕은 在位 21년, 서기 366년 신라에 사신을 보냈고, 2년 뒤에는 신라에 「좋은 말(良馬)」 2필을 선물했다. 백제나 신라 모두 말(馬)을 보는 눈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4세기 중원 땅에 기마족이 大南下(대남하)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에도 기마족이 진출했다는 필자의 가설을 지지해주는 기사다. 경주 천마총의 말 그림에 비쳐볼 때 이 때의 「좋은 말(良馬)」은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쉬지 않고 달린다던 서역産(산)의 키 큰 汗血馬(한혈마), 일명 赤兎馬(적토마)가 아니었나 싶다.
 
또 373년에는 백제 독산성 성주가 백성 3백명을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일어났지만 백제는 편지로 한 차례 항의만 했을 뿐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이는 진한 연맹을 대신한 신라가 마한의 소국들과 비교할 수 없는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만주 출신으로 보이는 정복군주 근초고왕이 강력한 기병대로 황해도 이남의 한반도 서부를 순식간에 정복해 나가면서도 진한 땅에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던(또는 못했던) 데서도 한반도의 동남부에 백제군과 대등한 전투력을 지닌 한 무리의 무장 집단, 즉 모용 선비 기마군단이 南下하여 자리잡고 있었음을 거듭 시사받을 수 있다.
 
기마족의 일본열도 정복說
 
4세기 이후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에 기마족의 진출 증거들이 확인되고 있다면 좁은 대한해협 건너편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미리 말한다면 일본열도에서도 기마족의 정복 흔적이 활발히 발견되고 있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4세기는 수수께끼의 세기」라고 부른다. 3세기의 일본은 위지 동이전의 왜인 조에서 보이는 야마대국(邪馬台國) 기사 등에 의해, 5세기의 일본역사는 宋書(송서)에 나타난 「왜 5왕」 기사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실상을 추측할 수 있는데 반해 4세기의 일본에 대해서는 문헌에서 그 실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고고학상의 발굴 성과에 의해 문헌의 절대빈곤을 다소나마 보완해주고 있다.
 
4세기 들어 일본에서는 거의 전국적으로 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한다. 기나이(畿內)를 중심으로 해서 서쪽의 규슈(九州)에서 동쪽의 칸토오(關東)지방에까지 공통된 형태를 지닌 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수께끼의 4세기에 훗날 일본국가의 기원이 되는 어떤 정치 질서가 생성되기 시작했음을 알게 해준다. 4세기에 시작된 고분은 갈수록 규모가 커져 5세기 초에 조성된 오진릉(應神陵)과 닌토쿠릉(仁德陵) 등은 倭國(왜국) 왕권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기마민족 도래설의 교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씨도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일본의 고분문화에 급격한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그의 학설의 최대 근거로 꼽고 있다.
 
에가미씨는 3세기 말(혹은 4세기 초)에서 4세기 후반까지를 「前期(전기) 고분시대」, 4세기 후반부터 7세기 후반까지를「後期(후기) 고분시대」로 나눠 구분한다. 전기 고분의 경우 구릉의 정상 가까운 곳에 고분을 만드는 특징이 있고 규모도 소박한 반면 후기 고분의 경우 만주와 몽골, 북중국에서 크게 활약했던 동북아시아 기마민족의 문화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전기 고분 문화가 주술적이며 상징적이고 소박한 규모에 동남아시아적인 농경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후기 고분문화는 현실적, 전투적, 왕후귀족적, 북방아시아적인 특징으로 바뀐다는 설명이다.
 
수수께끼의 4세기
 
에가미씨는 이처럼 고분문화의 내용이 전기에 비해 후기로 발전하는 데 있어 어떤 일관성이나 연속성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중시했다. 신라·가야 지역의 고분문화가 4~5세기를 거치면서 근본적 변화를 보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까? 그는 고분의 급격한 변화는 기마민족의 日本 정복에 의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천황의 상속제도, 여성의 높은 사회적 지위, 야마토 정권의 정치·군사적 제도가 대륙 기마민족의 그것과 매우 비슷한 점, 또 「일본서기」에 나오는 건국신화에 북방 유목민족의 요소가 강한 점 등을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의 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고분의 규모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의 4세기를 지나면서 왜국의 實力(실력)도 급성장하고 있다. 4세기 초까지의 倭軍(왜군)은 신라의 해변을 약탈하는 해적 수준이었다. 그런데 4~5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역량이 「갑자기」 신장되고 있다. 우리측의 사료에 근거해 볼 때도 4세기 말 왜의 군사력이 만만찮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393년 5월, 왜군이 신라의 수도 金城(금성)을 닷새나 포위하고 있고,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399년 왜·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해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가자 이듬해인 400년 고구려가 「무려」 5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도운 기사가 나온다.
 
기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왜가 고구려에 번번이 패하긴 하지만 계속 싸움을 걸어오는 꽤나 부담스런 상대로 그려져 있다. 일본측이 광개토대왕 비문을 조작해 왜의 역량을 과장했다는 주장을 편 한국 학자도 있었지만 중국 학자들이 비석의 표면을 샅샅이 조사해 본 결과 그런 흔적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아직도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4세기의 일본열도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4세기에 벌어진 엄청난 변화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국수주의적 황국사관에 사로잡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학자들은 4세기 급변의 동력을 일본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이는 고분의 형태나 고분에서 나온 각종 출토물의 고향이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 분명한 북방 기마민족風이란 점에서 타당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4세기 신라와 가야에서 확인되고 있는 급격한 변화, 즉 기마족의 정복 흔적이 왜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3국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된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나는 그 힘의 원천을 선비족 모용씨 기마군단으로 본다.
 
일본을 정복한 기마족의 出自(출자), 즉 기원과 관련해 에가미씨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三韓의 연맹장 辰王(진왕)으로 보았다. 즉 퉁구스 계통의 기마민족 지도자인 진왕의 지배를 받던 한 무리의 기마족이 현해탄을 건너 북규슈 지방에 상륙해 토착민들을 정복하고서는 韓倭(한·왜) 연합왕국을 세웠다는 가설이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한다면 기마민족의 일본정복설은 분명 설득력이 있지만 일본을 정복한 세력으로 삼한의 辰王(진왕), 즉 마한 목지국의 왕을 상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 에가미씨는 목지국을 일본에 가까운 가야지방에 있던 나라로 상정했지만 목지국은 마한의 맹주국으로서 충청 지역에 批正(비정)되고 있다.
   
일본을 정복한 기마족의 出自는?
   
또 진수의 三國志에 의하면 마한은 「소나 말을 타는 법을 알지 못한다(不知乘牛馬)」고 기록돼 있다. 3세기 후반까지 말도 탈 줄 모른다고 관찰됐던 충청도 목지국의 진왕이 4세기경 기마족으로 돌변해 일본열도를 정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에가미씨 가설의 최대 약점은 열도를 정복한 기마족의 出自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4세기 후반부터 일본열도를 정복해 가는 기마족은 어디서 나왔는가? 부여를 상정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부여족이 한반도를 관통해 왜국으로 진출할 정도의 대형사건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백제가 왜국을 정복했을 것이란 주장도 많지만 백제는 4~5세기 일본을 정복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북방 고구려와 國運(국운)을 건 대회전을 벌이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397년 백제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하고 태자 月典支(전지)를 볼모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으니 백제가 왜를 군사적으로 정복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또한 일본열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기마민족風 4~5세기 유물들의 원류를 백제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백제가 4세기 후반부터 왜와 활발한 인적·문화적·경제적 교류를 하면서 대륙의 선진문물을 전수해 주는 등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흔적이 일본 땅에 다수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 열도를 「무력으로 정복」한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현재의 김해, 부산 등지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상식이라고 할 때 4세기 후반~5세기 초에 걸쳐 왜국의 새 주인이 되는 기마족은 신라와 가야 땅으로 진출한 선비족 모용씨로 봐야 한다. 가야의 해안 지방까지 휩쓴 모용씨 기마군단 가운데 한 무리가 물길(海路)에 밝았던 토착 뱃사람들을 동원해 군함을 만들게 하고는 배에다 말을 태우고 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한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여류 동양학자 존 카터 코벨 박사는 한반도에 살던 기마족이 최소 2백 마리의 말을 배에다 싣고 가서는 일본 땅을 정복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北규슈 후쿠오카현에 있는 다케하라 고분의 벽화는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규슈로 상륙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풀이했다.
 
모용 선비의 일본 정복을 입증할 결정적 단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마민족풍 유물들이 신라·가야, 나아가 선비족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사실 일본에서 나온 冠(관)과 갑옷, 투구, 칼, 안장·등자를 비롯한 각종 마구류 등이 가야지역에서 발견된 것들과 극히 닮았다는 것은 상식화돼 있다.
 
한 예로 1992년 일본 奈良縣(나라현) 현립박물관에서는 新澤千塚(신택천총) 등 나라현 주변의 고대 고분에서 나온 출토물의 뿌리를 찾는 도록을 발간했다.
 
도록을 펴낸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신택천총 126호분에서 나온 관장식과 각종 보물, 유리그릇 등이 경주 대릉원의 신라 고분과 양산 金鳥塚(금조총)의 가야 고분, 나아가 중국 요녕성 일대의 고분에서 나온 출토물들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이들을 그 원류로 보고 있다. 일본의 고고학자들도 고대 고분에서 나온 출토물의 원래 고향이 중국 동북방의 대초원지대, 구체적으로는 선비족의 땅이었을 가능성을 이미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비의 유물이 어떻게 일본으로까지 이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필자는 342년 前燕(전연)의 임금 모용황의 명을 받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낙오한 모용 선비 별동대 1만5천명 가운데 일부가 신라로 들어갔고 그들 사이에 또다시 분열이 일어나 가야와 왜국으로까지 진출했다는 가설을 내세운다(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제1부 5장을 참고할 것).
   
역사의 主流
   
선비족 모용씨 기마군단이 신라와 가야, 그리고 왜국을 차례로 정복했다는 시각에서 본다면 지금껏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겨져 온 4~5세기 韓日 고대사가 깔끔하게 설명된다. 학문이든 세상 사는 이야기든, 숨겨진 사연을 밝혀나가는 데 있어서는 가장 쉽고 합리적인 설명이 「진상」에 가장 가까운 법이다.
 
한반도 동남부와 왜국에서 비슷한 시기(4~5세기)에 흉노風의 유적과 유물이 폭발적으로 출현하고 있다는 점, 신라 사신 위두가 「중국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시대변혁이 신라에서도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는 사실 등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다섯 오랑캐(=기마민족)의 말발굽이 북중국을 뒤덮고 있던 시절,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서도 한 무리의 기마족이 힘차게 정복전을 펼쳐가며 시대변혁-명호개역을 이뤄가고 있었다>
 
물론 문제의 기마족은 「흉노의 피를 이은 선비족 모용씨」 외는 상정하기 힘들다. 훗날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한반도 역사의 主流(주류)로 부상하는 金氏(김씨)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인의 조상은 檀君뿐인가?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라는 책을 쓰고 「한국 김씨의 혈관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는 글을 月刊朝鮮 9월호에 기고한 뒤 『金씨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韓民族(한민족)은 모두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국사교육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민족의 근원을 강물에 비유해 보고자 한다. 한강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크게 남한강과 북한강 줄기로 나뉘니 남한강은 태백산에서,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같은 북한강이라도 소양강은 설악산에서 시작하고 있고 홍천강은 또다른 水源(수원)을 갖고 있다. 이처럼 한강만 하더라도 수많은 샘에서 기원한 물이 모이고 섞여 大河(대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만약 우리가 한강 하류에서 한 컵의 물을 뜬다면 그 속에는 남한강의 물도 있고 북한강의 물도 포함돼 있게 마련이다. 북한강에서도 소양강의 물과 홍천강의 물이 적당한 비율로 잘 혼합돼 있을 것이다.
 
민족의 뿌리도 이와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 韓民族 역시 다양한 기원을 갖고 있으며 각 개인의 몸 속에는 개인마다, 집안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겠지만 다양한 피가 잘 혼합돼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유일한 조상을 가졌다는 주장은 정치 이데올로기로는 가능하겠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할 수 없다. 하나의 샘에서 흐른 물로는 큰 강을 이룰 수가 없듯이 한 명의 할아버지로부터 8천만 인구를 지닌 큰 민족이 형성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한강 하류의 물 속에는 황지 못에서 솟아오른 물도 있고 전혀 다른 금강산, 설악산의 물도 섞여 있는 것처럼 현대 한국인의 혈관에는 단군의 피는 물론이고 다소 간에 모용 선비의 피도 흐른다는 얘기다. 漢族이나 만주족, 몽골족, 일본족 등 우리와 교섭한 또다른 겨레붙이의 흔적도 적으나마 남아 있을 것이 틀림없다.
 
다양한 族源(족원)을 가진다고 해서 한민족의 정체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신라 통일 이후 천 수백년 동안 동일한 정치체제를 유지해 오면서 높은 수준의 혼혈을 이루었고, 그 결과 주변 민족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 한민족, 한겨레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우리가 비록 단일민족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族源(족원)의 다양성까지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몸 속에는 檀君에게서 물려받은 농경족의 유전인자는 물론이고 기원전 200년경 漢나라를 굴복시켰던 흉노의 선우 冒頓(묵특), 2세기 중엽 동서 1만 4천리, 남북 7천리에 이르는 시베리아 대초원지대를 석권했던 선비족의 전쟁 영웅 檀石槐(단석괴)로부터 전해져 온 기마족의 유전인자도 분명 포함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순수한 단군의 자손이다」라고 하는 말은 마치 한강의 水源은 태백산 황지 연못(池) 하나뿐이라는 주장과 똑같다.
 
새로운 「시대변혁」의 시대가 왔다
 
또 한민족의 발전과 관련해 외래변수를 내세우기보다는 自生的(자생적) 발전역량을 강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 史學이 자생적 발전론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일제 사학이 강요한 「조선민족 정체성론」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일제 황국사관 논자들은 식민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 역사의 피동성, 정체성을 퍼뜨린 것이 사실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학계는 이같은 그릇된 논리를 깨뜨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그런 맥락에서 자율적 발전론을 매우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내재적 발전론이 「과도할 정도로」 힘을 얻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외래문화의 충격이나 외부 인간집단의 유입 가설은 상당 부분 금기시·이단시돼 왔다.
 
하지만 이제는 정체성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세상과의 접촉·협력의 역사를 강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생적 발전론에 치중하다 보면 민족 감정상 뿌듯함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자칫 주변 세력 사이에 있었던 활발한 교류의 역사를 소홀히 다룰 위험성이 있다. 이 같은 역사인식은 그 자체가 史實(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세계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에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전문 역사학도가 아닌 필자가 기를 써가며 「한국 金씨의 뿌리는 흉노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선비족 모용씨」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순수한 피」 「자력경생의 역사」만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 세계화된 시대에 배타성, 독존의식만을 키울 우려가 농후하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인과 흡사한 얼굴에 비슷한 문화를 지닌 華僑(화교)들이 한반도에서 살지 못하고 떠나간 이유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극성스런 純血主義(순혈주의)에서 비롯됐다고 하겠다. 뒤늦게 화교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화교타운을 짓겠노라며 부산을 떨고 있지만 피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역사인식에 변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단일하지도 않고, 단일할 수도 없는 민족원류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자랑하기보다는, 다양한 족속과 접촉하고 그 피를 받아들인 과거 역사를 바로 알고 앞으로 여러 민족들과 활발히 교류·협력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배우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세계를 향해 대문을 열고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시대변혁」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월간조선 / 1999-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