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

전설을 넘어 민족사의 무대 속으로...
만주벌∼동몽골 4개코스 현지답사... 광개토대왕 정복로-요서지역 고구려성터 최초 발견
 

광개토대왕의 ‘전설’은 아직도 몽골 초원에 살아있었다. 고구려의 대외 정복로는 만주벌을 지나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을 넘어 동몽골초원(중국 내몽고 자치주) 깊숙이까지 뻗쳐 있었고, 광개토대왕과 연개소문의 영웅담이 그곳 유목민들 사이에 구전(口傳)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전성기 고구려의 영토도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중원과 만주의 경계선을 이루는 요하(遼河)의 서쪽, 만리장성 인근까지 펼쳐져 있었다.

 
전성기 고구려 북방 영토 기로 수심이 낮아진 강을 자전거를 들고 건너가고 있다.
주간조선과 고구려연구회가 공동 기획한 고구려 정복로 학술 답사단은 지난 6월 22일부터 25일간 중국 만주 동북평원과 대흥안령 산맥, 동몽골 초원 일대를 대상으로 학술 답사를 벌여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1300년만에 밟아본 고구려의 옛 영토. 그곳에서는 기마부대를 앞세운 고구려 정복군의 말발굽 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했다. 고구려의 몽골 초원 정복지는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뒤부터 줄곧 민족사의 무대에서 제외돼 왔던 곳. 발해가 그 뒤를 잇긴 했지만 고구려 시절의 세력권을 회복하진 못했고, 그 이후 민족사의 무대는 아예 한반도로 졸아들었다. 청대에는 만주족의 발상지라고 해서 봉금(封禁) 조치가 내려졌고 근대 이후에는 이데올로기 대결 속에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물론 그곳이 ‘우리만의 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옛 무대에서는 이후 요(遼)·금(金)·원(元)·청(淸) 등 역대 중국의 이민족 왕조들이 차례로 일어나 융성했고 고막해(庫莫奚), 지두우(地豆宇)처럼 이름만 들어서는 알 수도 없는 허다한 민족들이 수없이 명멸해가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구려 기병들이 누비고 다녔을 초원지대는 우리에게 잊혀진 존재가 됐다. 가도가도 끝없는 광대무변의 평원, 한반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강수량과 키 작고 비틀어진 풀들만 듬성듬성 자라는 척박한 사막. 그곳은 이미 농경문화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낯선 풍경이 되고 말았다. ‘이런 땅에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하고 의아해한 건 답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초원 민족이 명멸했던 곳 그러나 답사단은 직접 현장을 둘러보면서 1300여년의 세월을 넘어 수많은 이민족 역사가 켜켜이 쌓인 더깨 아래로 면면히 숨쉬는 고구려 역사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초원에 와보지 않고 어떻게 고구려 역사의 스케일을 실감할 수 있으랴!” 한 답사단원의 감탄사처럼 드넓은 초원 위로는 지금도 고구려의 전설과 신화가 떠돌고 있었다. 적잖은 학술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복로 답사는 크게 4개 코스로 이뤄졌다. 광개토대왕이 즉위 5년만인 395년에 벌인 첫 대규모 정복이었던 거란 정복로를 비롯해, 영락 12년(402년·영락은 광개토대왕의 연호) 선비족 왕조인 후연에 궤멸적 타격을 주어 결국 멸망에 이르게 했던 숙군성 공격 루트, 북부여가 망한 뒤 권력 공백 속에 놓여 있던 부여 고토의 무혈 점령로와 그 아들인 장수왕 대에 이루어진 동몽골초원의 지두우 정복로 등이다. 그 중에서도 답사단이 고구려의 실체에 가장 근접할 수 있었던 코스는 거란 정복로였다. 광개토대왕이 22살의 젊은 나이에 처음 나선 이 대규모 정복전은 ‘광개토경(廣開土境)’이라는 광대한 정복지를 건설하는 시발점이었고 고구려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광개토대왕비 영락 5년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린성 꿍주링시에 있는 고구려 천리장성 유적지. 멀리 답사단원들이 서있는 언덕이 천리 장성이다.
“영락 5년, 대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가 언덕에 이르러 패려(稗麗) 3부락 600∼700영을 부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 말, 양을 얻었으며 돌아가는 길에 요동 일원의 토경(土境)을 순수(巡狩)하였다.” 답사단은 대흥안령 산록의 요나라 상경성(현재의 林東)에서 남쪽으로 100∼150km 지점에 있는 시라무렌장(西拉木倫江)과 시랴오허(西遼河)가 비문에 나온 염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유력한 증거를 확보했다. 이 강의 하류와 시랴오허 중류에 이르는 100km의 남쪽 강안에 현지 사람들이 옌젠디(鹽石咸地)라고 부르는 강알칼리성 소금땅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한 것이다. 현지 지도에도 이 부근에 염택지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강의 북쪽 초원으로는 한동안 모래언덕 지형이 계속돼 비문에 나오는 ‘염수가의 언덕(鹽水丘)’이 바로 이곳일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비문에 나타난 부산과 염수의 위치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답사 결과 염수가 시라무렌장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푸순(撫順)에 있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진지 신성(新城)에서 출발, 랴오닝성과 내몽골자치주 변경 지대에 있는 이우뤼(醫巫閭)산과 누루얼후(努魯兒虎)산을 경유해 시라무렌장에서 일전을 벌인 뒤 랴오양(遼陽)으로 개선하는 여정의 거란 정복로가 유력해 졌다.  

 
진저우(錦州)시 이수안(義縣)의 카이저우촌(開州村)에서 발견된 고구려식 돌널무덤.천리 장성이다.
고구려의 기병 부대가 거란족과 일대 결전을 벌였을 시라무렌장은 시랴오허(西遼河) 평원 동쪽의 사막지대를 흘러나와 시랴오허로 합쳐진 뒤 랴오허(遼河) 평원을 향해 흐르는 거란족의 젖줄. 그동안 이 강이 염수일 가능성이 강력히 제기돼오긴 했다. 하지만 거란의 본거지에 가까운 강이라는 이유 외에는 염수로 볼 마땅한 근거가 없다는 게 역사학계의 고민이었다. 고구려사 분야의 소장학자인 국방군사연구소의 여호규 박사(36)도 “체계적인 연구 논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염수가 시라무렌강(江)일 가능성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후연 정복로에서는 한대(漢代) 요서군 지역에서 처음으로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고성이 발견돼 비포장 도로의 험난한 여정을 달려온 답사단을 흥분시켰다.

요서 고성엔 고구려식 돌널무덤떼가 답사단은 요하 서쪽 100∼150km 지점에 걸쳐 있는 따릉허(大凌河) 유역의 요서 지역에서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카이저우성(開州城)을 발견했다. 진저우시(錦州市) 이수안(義縣)의 카이저우촌(開州村)에 있는 이 고성은 1985년 이수안인민정부가 ‘개의현고성유지(開義縣古城遺址)’라는 이름의 성급 문물보호단위(보호문화재)로 지정한 곳. 넓이가 4만평에 이르는 토성으로, 성 동쪽 언덕 위에서 고구려식으로 추정되는 13기의 돌널무덤떼를 확인됐다. 돌널무덤에는 도굴 흔적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답사단의 한 고고학자는 “발굴을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최소한 완형이 남아 있는 무덤 한곳은 조성시기가 고구려 때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옛 문헌에는 요서 지역이 고구려 영토였다고 기록돼 있지만, 지금까지 중국 학계는 물론, 국내 학계도 대체로 요하 이동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카이저우성의 발견으로 “고구려 서쪽 강역이 영주(營州·현재의 자오양 부근)에 이르렀다”는 구당서 등의 기록이 사실임이 확인됐고, 이에 따라 고구려 영토에 대한 재검토도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시랴오허(西遼河)와 뚱랴오허(東遼河)가 만나는 합수지점의 시랴오허. 한 중국인이 건기로 수심이 낮아진 강을 자전거를 들고 건너가고 있다.
지난 85년 심양시 도서관 사회과 참고부가 출간한 ‘동북명승고적질문(東北名勝古蹟車失聞)’에는 “의현 남쪽 40리에 고구려 고성이 있는데 남쪽 연못의 둘레가 100여보에 이르는 거성이다. 옛날 동전과 기와가 많이 나왔는데 대부분 고구려 것이어서 고구려성임을 확정할 수 있다”고 돼 있어 이 성은 고구려 유적에 대해서는 유독 인색한 중국 문화재 당국으로부터도 고구려성임을 인정받고 있다. 답사단의 서영수 교수는 “이 성은 장수왕 때 요서군 지역을 영토로 확보한 뒤 건설한 지방관의 치소(置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장수왕대에 있었던 따싱안링(大興安嶺) 원정로도 그동안 이 산맥을 넘어서기 어려운 지리적 장벽으로 인식해온 국내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만 했다. 지도상으로만 보면 길이와 너비가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의 대규모 산맥이지만, 실제 답사해본 결과 최고봉 황장량(黃岡梁)이 2029m 정도로 산이라기보다 거대한 고원에 가까웠다. 말타기에 뛰어난 고구려 기병이라면 1주일 이내에 손쉽게 돌파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산맥 너머 동몽골 초원은 이 부근에서 유일하다고 할 만큼 풍부한 말 산지여서 전성기의 고구려가 이곳 정복에 나선 이유도 실감할 수 있었다.

학술적인 논란은 남아있지만 중국측의 일부 학자들이 ‘고구려 천리장성’이라고 주장하는 지린(吉林)성 꿍쭈링(公主嶺)시의 고성 유적지를 처음 확인한 것도 망외의 성과였다.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회장은 “정복로 답사는 국내 역사학계로는 처음인데다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해 학술적으로 입증하기엔 부족한 점이 아직 많다”면서도 “민족사에서 외면받아온 이곳의 역사를 복원하려면 국가적인 차원의 연구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1999-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