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복로] 질풍의 정복루트, "소금강"을 찾아서

광개토왕 5년의 첫 정복전… 1600년 전 비문의 현장 '시라무렌江'

따싱안링(대흥안령)을 동에서 서로 횡단했던 베이징왕 지프차 (북경지프유한공사가 만드는 중국산 지프차)는 요 제국의 수도였던 린뚱(임동)에서 남쪽으로 5시간 이상을 달려 내려왔다. 이제 시라무렌장(서랍목륜강) 하류가 멀지 않았다. 거기서 시라무렌은 서남쪽에서 올라온 라오하허(노합하)와 합쳐져 시랴오허(서료하)가 된다. 강이 가까워지면서 한동안 모래 언덕들이 연이어졌다.  

 
허옇게 강바닥을 드러낸 시라무렌에는 소금기 때문인지 기묘한 모양의 버드나무들이 밀집해 자라고 있다.
고구려 정복로 학술 답사단은 남만주의 푸순(무순)에서 따싱안링의 남쪽 산록에 있는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 대신,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했다. 정복로를 역으로 밟아 내려간 셈이다. 25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는 비포장길을 달려 출발지점으로 돌아갔다가 당초 원정로를 따라 다시 올라올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라무렌은 어떤 곳인가. 후대의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린뚱의 조주성에서 말을 타고 달려와 놀고 갔다는 거란 안마당의 젖줄이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수백년 전 광개토대왕이 이곳의 거란을 정복함으로써 제국의 기틀을 닦았던 곳이기도 했다.

시라무렌이 가까워 오면서 주변의 풍광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띈 것이 기이한 모양을 한 버드나무였다. 초원 곳곳에 널린 게 (방풍림 조성을 위해 심어둔) 버드나무이지만 시라무렌의 버드나무는 달랐다. 사방으로 활개를 쳐야 할 가지가 줄기에 바짝 들러붙어 고슴도치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줄기마저 뱀이 기어가듯 기기묘묘한 모양으로 한쪽으로 휘거나 비틀어져 있었다. 강변에는 붉은색, 노란색, 분홍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이 근처 어디에 꽤 큰 강이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본 강에는 물 한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시링허(시령하). 시라무렌장은 장마철처럼 비가 올 때는 폭 2∼3km의 거대한 강이 됐다가 건기에 접어들면 물 한방울 없이 하얀 강바닥을 드러내는 계절하였다. 시라무렌이 하얀 강 을 의미하는 몽골어인 이유가 여기서 풀렸다. 서기 395년의 어느날, 즉위 5년째를 맞은 22살의 혈기방장한 광개토대왕은 첫 대규모 원정길을 나선다. 벌써 수년째 요동의 변방을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거란의 본거지를 정벌해 일거에 화근을 뿌리뽑으려 한 것이다. 수도 국내성에서 요동 방어의 거성인 신성으로 인 어가는 신성에서 정복군을 열병하고 서북쪽 시라무렌을 향해 출발했을 것이다.

거란 정복전은 여러가지 목적을 노린 것이었다. 변방의 도적인 거란을 제압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지만, 이 참에 내외에 `젊은 애숭이왕'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만주벌에서 서쪽으로 요동, 동몽골 초원으로 이어지는 이 광할한 지역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젊은 왕이 힘을 과시하는 것은 곧 이곳에서 한 국가가 살아남는데 관건이 된다.당시 고구려의 앞마당인 요동 일대에는 북위에 밀려온 선비족의 후연이 버티고 있었다. 언젠가 후연과 일전이 불가피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 참에 거란도 혼내주고 후연에 고구려의 힘을 보여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정복길에 오른 대왕의 뇌리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요제국을 일으킨 태조 야율아보기의 묘. 내몽고자치주 린뚱(林東)부근의 조주성에 있다.해 자라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이 정복로를 부산, 부산을 지나 염수가 언덕(염수구)에 이르러… 라고 쓰고 있다. 신성을 출발한 고구려 철갑기병 부대가 부산과 또다른 부산을 지난 뒤 `어느 소금강가의 언덕배기'에서 적을 대패시켰다는 것이다. 종래 학계에서는 염수를 요동 안쪽에 있던 훈허(혼하)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훈허의 옛 이름이 염난수니까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울타리 안인 훈허로 거란을 정복하러갔다는 것은 도무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많은 학자들이 거란의 본거지가 있는 시라무렌을 염수가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근거가 없었다. 답사단은 `소금 염'자에 주목했다. 기이한 버드나무의 풍광처럼 고구려 군사들이 이 낯선 곳에서 `염수'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소금강'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날 숙소에서 답사단은 현지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도상연습을 했다. 내몽골자치주가 발행한 현지 지도에는 시라무렌과 시랴오허 남쪽 유역에 염택지가 드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장수왕의 따싱안링 정복로를 찾은 답사단은 초원의 곳곳에서 이곳 사람들이 옌젠디(염석+함지)라고 부르는 강알칼리성의 소금땅을 목격했다. 초원의 풀밭 한가운데 머리가 벗겨진 것처럼 풀이 자라지 않는 땅, 허옇게 소금기가 땅 밖으로 올라와 있는 황무지가 바로 옌젠디다.

옌젠디는 초원의 적은 강수량 때문에 땅밑에 있던 소금기가 지하수를 따라 지표면으로 상승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작은 것은 수백평에서 큰 것은 수천평이나 됐다. 동몽골 초원의 최대 도시라는 시린호터(석림호특)에 요나라 때의 소금 산지인 대염박이 있고, 지금도 한해 12∼13만t의 소금을 생산해내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초원의 양과 말, 소가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부지런히 혀놀림을 하고 있다면 그곳은 옌젠디일 가능성이 높다. 몸에 필요한 소금을 옌젠디에서 섭취하는 것이다. 초원과 소금, 뭔가 어울릴 것같지 않은 두 주제가 옌젠디로 인해 하나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거란족은 소금장수로 통했다. 그들은 늦봄부터 양이나 소, 말을 몰아 초원의 염지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초여름까지 소금을 생산한 뒤 1년 내내 중원과 만주 지역에 내다 팔고 식량과 생필품을 사갔다. 시라무렌이 염수라면 분명, 이런 옌젠디들이 있을 것이다. 옌젠디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염택도 이 즈음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라무렌이 비문에 적혀 있는 소금강일 것이다. 7월 2일, 린뚱을 출발한 답사단은 5시간을 달려 시라무렌으로 내려왔다. 소금강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라무렌 하류와 서요하 중류에 이르는 100여km의 남쪽 강안을 뒤지는 작업이 시작됐다. 살을 익히는 오뉴월의 햇살이 초원의 강변 모래 언덕에 눈부시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6시간을 헤매고 다녀도 옌젠디는커녕, 염택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요하와의 전쟁'. 랴오닝성 인민정부는 해마다 범람하는 요하 일대 지역의 홍수 방재를 위해 지난 90년대초부터 강 양쪽으로 거대한 둑을 쌓아왔다. 이 둑으로 인해 강유역은 이제 거대한 농경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홍수 때마다 침수돼 황무지로 변해버렸던 강 유역은 기름진 땅으로 변했고, 그 속에서 중국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옌젠디도 모두 무논으로 바뀌어 버린 것인가.  

 
정복의 출발지로 추정되는 요동의 신성. 성의 남쪽으로 멀리 푸순(撫順)시가 내려다 보인다.眉箚?있다.
한낮의 더위와 소금강을 찾지 못한 허탈함이 겹쳐 답사단은 파김치가 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서요하 상류에 있는 신리툰(신립둔)이라는 마을. 300호 정도 규모의 이 마을에서도 옌젠디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마을 입구 부근에서 거짓말처럼 1만여평 규모의 옌젠디가 나타났다. 무논들 사이로 끼어 있는 이 황무지에는 100여개의 소금물 웅덩이들이 달의 분화구처럼 자리를 틀고 있었다. 강안에서 100m 남짓 떨어진 이곳도 과거에는 시랴오허의 강바닥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예외없이 농경지로 개발되고 있었다. 신리툰의 마을 사람들이 낯선 외지 사람을 경계하며 모여들었다.

이곳을 뭐라고 불러요? 옌젠디라고 해요.

왜 다른 곳은 벼논으로 개간했는데 이곳을 놀리고 있어요? 소금이 있어서 풀이 안 자라요. 물을 들여서 희석을 시켜야 되는데 지금은 물도 없고 사업할 돈도 없어요.

근처에서 삽을 들고 작업을 하고 있던 마을 사람 훠펑퉁(곽풍동·35)씨가 답사단에게 옌젠디를 설명하고 나섰다. 그에 따르면 이런 옌젠디는 이곳을 기준으로 서쪽으로, 시라무렌 동쪽으로는 서요하 중류까지 100여km에 걸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소금기가 도는 땅은 풀이 자라지 않아 농경지로 개간하려면 물로 수개월 동안 희석시킨다고 했다. 겉으로 소금이 묻어 나오는 옌젠디를 와이옌젠디라고 하고, 표면에는 소금이 없어도 안에 소금기가 있어 풀이 자라다 죽어버리는 곳을 나이옌젠디라고 한다고 세밀하게 분류해 설명하기도 했다. 옌젠디에는 시커멓게 잿물도 지표면으로 번져 올라와 있었다. 아무리 물로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고 훠씨는 말했다.

소금강을 찾았다. 훠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답사단은 속으로 환호성을 올렸다. 린뚱에서 동남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시라무렌과 서요하가 이어지는 곳 주변에서 그렇게 찾았던 옌젠디와 염택을 발견한 것이다.

린뚱에서 내려오는 길에 시라무렌 주변에서 보았던 모래언덕, `시라무렌'과 시랴오허 남쪽의 소금땅… 비문에 나타난 `소금강 언덕'(염수구)이 1600년의 세월을 넘어 현장 속에서 재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라무렌이 비문에 나오는 염수라면 정복 루트는 좀더 분명하게 구체화된다. 신성을 출발한 대왕의 군은 요하평원을 지나 처음으로 만나는 이우뤼(의무려) 산과 누루얼후(노노아호)산 옆을 지나 이곳 시라무렌으로 왔을 개연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요하 평원을 서쪽에서 굽어보고 있는 산도 이 두 산밖에 없었다.  

 
광개토왕의 대군이 스쳐 지나갔을 요동평원의 이우뤼산. 이산은 중국 한나라 때 요동군과 요서군의 경계였다.
답사단은 수일 뒤 푸순에서 출발해 시라무렌에 이르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정복로를 이번에는 남쪽에서 제대로 짚어가 보기로 했다. 석탄의 도시 푸순 북쪽에 위치한 신성은 답사단이 거란 정복로의 출발점으로 본 곳이다. 사서의 기록에 빈번이 등장하는 남만주의 고구려 거점 성곽으로 주변에 석대자산성 등 적잖은 위성을 거느린 거성이다. 이 성은 사서에서 4세기 초반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유비에 비유되는 16대 고국원왕에 의해 건설됐다. 그러나 이곳을 거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웅지를 펼쳤던 왕은 342년 이 신성으로 공격해 돌어온 모용선비의 전연에 수도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고 371년에는 결국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비운의 왕' 고국원왕의 한이 어린 신성을 출발한 광개토대왕의 군은 요하를 건넜을 것이다. 너른 요하평원은 기병부대가 하루면 충분히 지나갈 정도로 평탄한 곳이었다. 3만∼5만의 철갑대군이 노도처럼 말을 타고 이곳을 건너갔을 것이다.

그 너른 평원을 지나 시라무렌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만나는 산지가 바로 랴오닝성 북쪽의 이우뤼산이다. 동호족 말로 `큰 산'이란 뜻인 이우뤼산은 높이 876m에 불과하지만 나즈막한 요하평원과 만나는 첫 산이어서인지 훨씬 커보였다.

중국의 10대 명산의 하나로 꼽히는 산답게 기암절벽과 소나무가 잘 어우러져 있어 고구려군이 `풍요로운 산(부산)'이라고 부를만한 곳이었다. 산 중의 바위 벽 위 곳곳에는 요대와 청대에 건설된 망루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멀리 남만주를 내려다보는 군사적 요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고구려 군이 이 험악한 바위산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문의 `과부산부산'이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병부대는 이 산을 왼쪽으로 보면서 산 동쪽 구릉지대를 지나갔을 것이다. 시라무렌으로 가는 두번째 장벽은 랴오닝(요녕)성과 내몽골자치주의 자연 경계선인 누루얼후산.

여기서부터 동몽골 초원이 열리기 시작하는 초원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산이다. 수림이 풍부한 산도 이 산이 마지막이다. 그 다음부터 나타나는 초원의 산은 면도한 것처럼 엷은 연초록 풀들만이 자라나는 벌거숭이 산들이었다.

그로부터 시라무렌으로 이르는 길은 탄탄대로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수백∼수천마리의 양떼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가끔은 한가로이 물을 마시고 있던 말들이 초원의 불청객들에 놀라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 버리기도 했다. 푸순에서 시라무렌까지 답사단이 달려온 거리는 모두 400여km. 대왕의 기병은 이틀도 못돼 이곳에 도착했을 듯 싶었다. 답사단은 이제 비문의 승전보를 떠올렸다.

3부 600∼700영을 부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 말, 양을 끌고 왔다. 구름처럼 뒤를 따르는 `우마군양'의 떼를 끌고 후연 국경지대에 있는 양평 (현재의 랴오양)으로 돌아왔다는 게 비문의 기록이다. 대왕은 귀환길에 그동안 거란족에 시달려온 국경지대의 1만여 가구를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고 삼국사기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철갑기병의 대군을 이끌고 국경지대를 순수한 것은 단순히 국경의 주민을 위로하려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첫 정복에서 완승을 거둔 자신감으로 그 서쪽에서 대왕을 눈여겨보고 있는 후연을 향해 `올테면 와보라. 거란족처럼 만들어줄테다'고 한마디 내뱉기 위한 무력시위에 가까웠을 것이다. `광개토경'의 치세가 이로부터 그 막을 올리고 있었다.

(주간조선 1999-9-22)


[취재 뒷이야기] 초원유감(草原遺憾)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에 '고구려 정복로 1만3000리를 가다'를 쓴 최유식 기자 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중국 곳곳에 산재한 카오리청, 우리말로는 고려성(高麗城)이라는 데 대한 얘기를 해볼까합니다.

(얘기하기에 앞서서 여기서 고려라는 말은 모두 고구려(高句麗)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 자체도 하나의 별도 얘기가 되겠지만 잠시 설명하자면 고구려의 국호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가 맞습니다. 중국 사서에는 고구려라고도 하기도 하고 고려라기도 합니다.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하고난 뒤에는 비하하는 의미로 아래 하(下)를 써서 하구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나 중원고구려비 등 고구려인들이 직접 만든 기록에는 모두 고려라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와 언어가 달랐던 중국인들이 고구려인의 발음을 적당히 자기네말로 끼워 맞춰 만든 게 고구려지요. 학자들은 당시 고리나 구리가 정확한 발음이 아니었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고구려를 계속 쓰고 있는가? 학자들은 이미 오랫동안 써와서 이제와서 바꿔서 고려라고 하면 국민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래 국호가 조선인 고조선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번에 저희 정복로 답사단이 둘러본 랴오닝성이나 내몽골자치주에는 고려라는 이름을 붙인 지명이 참 많습니다. 랴오닝성의 자그만 산골 마을에서부터 내몽골자치주 따싱안링산맥의 산록 초원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있습니다. 그 형태도 고려성 외에 고려영자(영자는 부락, 마 을 정도로 해석), 고려하 등으로 가지각색입니다.

저희와 함께 정복로 답사에 나선 고구려연구회의 서길수회장과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이 점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있는 고려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되도록 다 다녀보았지요. 이 지역에 대한 정밀지도와 1920~1930년대 일본, 러시아의 전문가들이 시베리아 철도 건설 등을 이유로 이 지역을 조사해놓은 보고서 등에는 이런 '고려' 자(字)가 붙은 지명들의 자세한 위치가 밝혀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현장에 가보면 고려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길림성에서 따싱안링산맥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눙안(農安)이라고 곳이 있습니다. 요나라 때 황룡부라고 불렀던 동북평원의 요지이지요. 초원의 유목민족과 동북평원의 수렵-농경 민족 간의 교통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라고 할만한 곳입니다.

이곳에 카오리청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보았는데 요나라 때 성이었습니다. 저희를 따라간 고고학자(이름은 본인의 요청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유를 언급하지요.)는 토성벽 속에 박힌 붉은 기와를 들어 '고구려 것' 아니냐고 하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발해만상에 있는 국화도라는 섬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지로부터 3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다보면 이 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그만 부속섬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는 거의 완형에 가까운 토성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답사단은 이 섬에 카오리청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일정 마지막에 달려갔습니다. 배를 타고 들어갈 때 유람선 선장에게 물었더니 역시 "카오리청"이란 대답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명나라 때 만들어진 성이었어요. 기와편은 거의 없고 명나라 때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 몇 개가 나왔을 뿐입니다. 국화도향정부에 가서 물어보니 마찬가지 대답이었습니다. 벌써 중국 문화재당국이 조사해서 17세기에 만들어진 명대 성으로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사례는 더 있습니다. 1930년대 러시아 학자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을 위한 조사차 이곳을 방문해 만든 렐리제프 보고서에 내몽골자치주 울란호터 근처에 카오리청이라고 언급한 곳이 있어 가봤더니 금나라 때 망루로 추정되는 곳이었어요. 그 인근에 또 한군데를 가봤더니 그곳에서도 "당나라 때 동전이 많이 나왔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이렇게 모두 아닌 것 같은데 왜 현지인들은 이곳을 '카오리청'이라고 할까요? 답사단도 늘 고민스럽고 궁금한 부분이었습니다.

저희는 크게 세가지 추론을 해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요즘 식으로 말해 고구려성의 축성술이 워낙 뛰어나서 '성(城)하면 고려성'으로 인식이 굳어져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상품브랜드 중에 애프킬라와 비슷한 거죠. 뿌리는 모기약에 다른 상표가 많이 나왔는데도 우리는 지금도 애프킬라를 모기약의 의미로 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축성술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사서에 "고구려 사람은 성을 잘 쌓아 쉽게 공격하기 힘들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입니다. 고구려 석성을 주의깊게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담벼락 처럼 늘어선 성 중간에 요철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습니다. 이걸 치성(雉城)라고 하는데 정면에서 달려드는 적을 좀더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성 방어장치 중의 하나입니다. 바로 이 치성이 고구려의 특허품에 해당합니다. 요나라 이후 중국은 대부분 이 치성과 또하나 고구려의 독창적인 축성술인 옹성을 성 건설에 도입하게 됩니다. 그러니 '성=고려성'이라고 할만 했을 겁니다.

두 번째는 '고려인에 의해 만들어진 성'일 가능성입니다. 고구려가 망하고 난 뒤 만주지역엔 발해가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발해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승계한 나라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려라고 했습니다. (역시 발해라는 국호도 중국이 붙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발해사람은 고려인이 되는 것이죠. 발해가 요나라에 망한 뒤 고려인들은 중국 내지와 거란 지역으로 많이 이주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들중 축성술에 뛰어난 사람들이 요나라의 명에 의해 축성하는 데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메이드 바이(Made by 고려인)'이라는 의미에서 카오리청 아니었느냐하는 분석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그곳에 원래 카오리청이 있었는데 나중에 요, 금, 명대에 다른 나라들이 그 성을 고쳐서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원래 성이 위치하는 요지는 후대에도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그곳이 그곳인데다 고구려인이 성을 잘 쌓으니 그걸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추론을 해보면서도 어느 것 하나 그럴 듯하다고 느껴지는 게 없었습니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고구려 것이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닐까 하는 찝찝한 구석이 남은 탓입니다.

카오리청에 얽힌 이 이야기를 굳이 장황하게 말씀드린 이유는 기실은 딴 데 있습니다. 고구려 문제에 관한한 우리 사회는 양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한 쪽에는 학계, 또 한쪽엔 재야 사학계가 있어 서로 제 갈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재야사학계는 뚜렷한 학문적 근거 없이 터무니 없이 고구려 역사를 과장하는 경향이 뚜렷하고 우리 학계는 "그 사람들은 작가"라며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 소 닭보듯 하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기는 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대륙을 탐사하고 연구할 기회가 무수히 많았는데도 '연구비' 타령만 하면서 제대로 잊혀진 고구려 역사를 밝혀내는데 소홀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실증사학의 틀에 얽매여 뻔히 문헌과 금석문에 나와있는 내용도 고구려 것이면 부정하고 봤다는 겁니다. 여기에 반발할지 모르는 학자분들을 위해 한 예를 소개하지요.

얼마전 고구려성임이 확인된 아차산성만 해도, 처음 발굴할 때 고구려성이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발굴팀의 팀원(제자)은 백제성이라고 주장하는 팀장(스승)의 서슬 때문에 감히 '고구려성'이라는 얘기를 못꺼냈다고 합니다. 그 때문이 이 산성은 한동안 백제성 인줄만 알고 지냈다고 합니다.

수십년이 흘러 그 스승이 죽고 나서 그제서야 고구려성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발굴이 이뤄져 고구려성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스승의 명을 거스르고는 학계에서 생 존할 수 없는 낡은 국사학계의 풍토가 만들어낸 웃지 못할 비극입니다.

그리고 이런 학계의 반대편에는 역사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재야사학계가 있습니다. 오늘 제게 온 독자의 이메일을 하나 소개하지요.

"최기자님! 고구려성 및 유적은 서안, 낙양에도 있고 돈황과 트루판에도 있다고 합니다. 그깟 고구려 영토를 서쪽으로 조금 늘린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차피 모두 가짜인데! 일제가 써준 역사를 텍스트로 하여 아직도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와 남만주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중원, 그러니까 황하를 중심으로 한 북중국의 한 복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물론 그 이웃이었던 백제와 신라도 현재의 중국대륙에 있었겠지요.

저는 역사 연구가는 아니고, 어린 학생시절 국사시간을 접할때마다 거의 모든 내용들에 대해 "과연 그랬을까, 정말 맞아?"하고 의문을 가지면서 이면의 다른 국사에 계속 관심을 가져온 사람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우리나라에 의외로 많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우리 역사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삼국의 중원 존재설은 분명히 논리적 실증적 근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야학설이라는 것 때문에 역사교육의 기득권과 그로부터 소득을 오랫동안 창출해온 제도권 학자들로부터 의식적으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

이분의 주장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이미 카오리청을 찾는 저희의 작업에서도 느끼실 수 것입니다. 대개 "어느 곳에 고구려 유적이 있다더라"는 얘기가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확인도 해보지 않은 채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깁니다. 하지만 10여군데 이상 고려라는 지명이 나오는 현장을 살펴본 저로서는 이제 그런 전문만을 믿고 그건 고구려 것이라고 할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말을 여러분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의 역사라고 해서(현재의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서) 왜곡하거나 실증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역사과학의 상식입니다.

저는 고구려 역사에 대한 분석과 천착은 지금부터라고 봅니다. 하나하나 현장을 보고 분석해 과학적으로 진실을 밝혀가야할 것입니다. 조급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직 때가 안됐지만 언젠가 고구려의 역사가 우리의 시대의식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건 웅변이 아니라 역사과학입니다.

이번 저희의 답사 결과가 양쪽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의 일환이 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