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또 하나의 백제 있었다”

한국사 미스터리 현장
학계 진동시킨 한 사학자의 10년 추적 논문


“중국에 또 하나의 백제 있었다”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 사람들은 우리나라 백제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를 사용하고 명절 때는 강강술래 놀이를 한다.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일으킨 백제인 흑치상지는 필리핀에서 태어난 22담로 중 한 가문 출신으로 밝혀졌다. 중국에 거대한 백제세력이 있었다는 증거다.

96년 10월 중순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숭산(崇山)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허난성의 수도 정주에서 대절버스를 빌려 낙양 방면으로 2시간 남짓 달리다가 소림사 입구 쪽에서 10분간 휴식시간을 갖고 있는데, 승객을 실은 일반버스가 마침 우리 일행 앞에 멈춰 섰다.
『저 버스 좀 봐. 「百濟(백제)」라고 씌어 있네』

누군가 소리쳤다. 분명히 버스 노정을 알리는 차창 간판에는 우리의 고대나라 백제와 한문글자 하나 틀리지 않았다. 허난성 소속인 그 중국버스는 분명히 인근의 백제쪽에서 소림사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소림사행을 취소하고 그 버스로 「백제」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을 찾아 그 연유를 캐고 싶었지만, 단체 행동의 제약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숭산 소림사에서 무술시범을 보면서도 내내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황하강 남쪽 하남(河南)의 숭산에서 만난 「백제」라는 단어. 그 옛날 우리의 선조 백제인들은 한강 이남의 땅을 역시 「하남」이라고 불렀고, 그 왕성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하남 위례성 인근에는 중국의 숭산과 똑같은 한자 이름을 가진 숭산도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황하의 남쪽을 의미하는 「하남」과 산(숭산)이 한반도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나타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또 우리가 배운 역사 지식으로는 중국 허난성 숭산 인근에 백제라는 이름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숭산과 가까운 낙양의 북망산에서는 1920년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615~682년)의 묘지석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이 모두가 우연의 일치일까?

그 비슷한 무렵, KBS 방송팀이 한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 인접지역인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壯族自治區) 일대를 탐방했다.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에서 전남지방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서낭당 문화의 흔적을 찾아냈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장족자치구 사람들의 명절 지내는 풍속은 고대한국 마한사람들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들은 정월 보름과 단오절을 최대의 명절로 경축하고 있다. 장족의 민속춤인 「삼현춤」을 출 때는 춤꾼들이 둥근 원을 그리는 가운데 춤을 이끄는 남자가 삼현금으로 반주하면, 그밖의 사람들은 박자에 따라 노래하고 춤추면서 원을 줄이기도 하고 확대하기도 하면서 긴 소맷자락을 내젓는다. 이 춤은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마한편에 나오는 강강술래와 흡사한 것이다. 후에 마한 곧 백제의 역사로 이어짐은 물론이다.

대륙(중국) 백제설의 탄생

그로부터 정확히 1년이 지난 97년 10월경 한국의 사학자가 10년간의 연구끝에 「대륙(중국) 백제」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문을 정식으로 발표, 고대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간 백제의 「요서 진출설」(한반도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에 진출했다는 학설) 등이 학계에서 제기되긴 했으나, 이 논문은 한반도 백제 세력이 아닌 또다른 백제 세력이 중국내에 존재했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KBS 방송팀에 장족자치구에 존재하는 백제의 흔적을 알려주기도 한 이도학(李道學·40)박사가 그 주인공. 84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91년 한양대에서 백제사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줄곧 대륙백제의 존재를 파헤치기 위해 몰두해온 학자다. 그의 학설은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치밀한 논리 전개로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그의 학설에 대한 다른 학자들의 반론은 제기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씨의 논문은 곧 『새로 쓰는 백제사』(푸른 역사 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동방의 로마제국, 백제사의 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부제로 달고 나온다. 이씨는 이 책을 펴내면서 『이제 우리는 백제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그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제사 상식에 비추어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백제를 잘못 알고 있었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마저 자아낸다. 일단 이박사의 논증을 참고삼아 백제사의 미스터리 세상으로 들어가보자.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자치통감> 영화 2년 정월 조)

기원후 346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부여의 발상지인 녹산은 송화강 유역을 가리킨다. 한반도 서남안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있는 만주 송화강의 부여국을, 어떻게 한반도 백제가 침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 이래로 우리 사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백제」라는 이름은 아마도 「고구려」를 의미하는 오기(誤記)일 것이라고 간주해왔다. 혹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백제의 해상진출과 관련지어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화강 유역은 만주 내륙이므로 해상진출과는 어울리지도, 관련되지도 않는다. 이어서 다음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백제국은 본디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송서> 백제 조)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후한서> 건광 원년 조)

위의 두 기록 역시 우리가 배운 고대사의 상식으로 보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는지 말이다.

이도학씨는 앞에서 인용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 만주 땅에 백제라는 또다른 나라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중국학계에서 정사(正史)로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간에 베낀 것이 아니고 계통이 다른 백제 관찰기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중국 대륙의 백제가 중국 역사가의 눈에 띄게 된 것은 4세기 중반의 일이다.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륙 백제는 지금의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부여를 서쪽의 전연(前燕) 근처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 요동지역의 강자인 전연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3년 경으로 짐작되는 전연과의 전투에서 대륙 백제는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거니와, 바로 이 때문에 그 존재가 동아시아의 역사 무대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한국측 역사서에도 대륙 백제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 기사는 우연찮게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꼽힌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도학씨의 해석.

『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된다.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이 대목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당시 한반도 백제국과 고구려 사이에는 낙랑군과 같은 중국 군현이 버티고 있어서 서로 교류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4세기에 접어들어 북중국은 5호16국 시대의 대혼란이 개막되었고, 그 파장은 고구려에도 미치게 된다. 고구려가 서쪽지역에 국력을 집중하는 틈을 타 만주의 백제는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이후 중국측의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그렇다면 4세기 중반에 만주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와 한반도 중부지역에 있던 백제국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양자는 국호가 동일하니 만큼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백제 건국사에는 두 사람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못박듯이 말한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주서> 백제조)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수서> 백제 조)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한원> 백제조)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고구려와는 무관한 부여계라는 점,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사실 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이라면 씨성이 고씨(高氏)가 되어야 하는데, 백제 왕들은 한결같이 부여씨(扶餘氏)를 씨성으로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뉘며, 모두 부여계 출신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 때문이다.

1천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동명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도학씨는 백제 국왕은 왕성인 몽촌토성에서 검단산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의식을 집전하였으리라고 말한다. 이는 중국 황하강 남쪽 하남의 숭산에 소림사가 있다는 점과 대비해 묘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이도학씨에 의하면 이처럼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세력이 온조계이며, 만주쪽 백제는 비류계 세력이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후에 어떻게 결합했느냐 하는 점이다.

『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兄)으로 전해진 데서 짐작되는 종가격인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만주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충남대 박순발교수(고고학)는 『서울의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앞 시기의 묘제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양식이 아닌 새로운 묘제 양식을 지닌 세력이 돌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시기는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백제가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강력한 정복국가로 변신한다. 이후 백제 조정에 등장하는 유목국가의 직제인 좌·우현왕제라든지, 북방민족적 색채를 띠고 있는 「어라하」「건길지」같은 왕의 호칭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와 함께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 모든 역사적 기록이 대륙백제(비류계)와 한반도 백제(온조계)의 결합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

필리핀 출신의 흑치상지

한반도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해상을 장악함은 물론 중국대륙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백제는 먼저 황해의 많은 도서를 부속 영토로 하였다. 백제 왕실의 사냥터로 유명한 강화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서남해안에 사람이 사는 15개의 섬은 모두 백제의 행정지배를 받으면서 기항지 역할을 했다.

이곳을 토대로 한 백제의 해외경영은 다양한 인종의 거주와 물산의 집중을 가져왔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이도학씨는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실크로드』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씨는 백제의 해상실크로드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존재가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펼친 흑치상지(630`~689년)라는 백제 장군이라고 말한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여기서 백제가 부여씨의 왕족 중 누군가를 흑치(필리핀)에 봉했다는 것은, 흑치가 백제 해상실크로드의 한 거점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막강한 해상교역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조선술은 당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일. 실제로 백제는 「방(舫)」이라고 표현되는 대형 선박을 이용하였고, 488~490년에는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북위와의 해전(海戰)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상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백제의 선박은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나 있었다. 650년에 왜가 제작한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을 「구다라선(百濟船)」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선박을 가리키는 「구다라선」은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해안땅을 지배한 백제

백제는 광범위한 해상력을 장악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까지 진출하게 된다. 백제가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한 기간(475~538년)에는 남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한 때였다. 당연히 백제의 남중국에 대한 거점 확보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송서>는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였는데,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郡) 진평현(縣)이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양서>에서는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였는데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라고 씌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백제의 요서경략설이다. 그러나 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진평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불명확해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많은 문제다.

진평군과 백제군은 과연 어디일까. 중국 복단대학 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위치 추정을 인정한다면 백제가 해상항로와 관련하여 중국 복주시 지역에 설치한 진평군은, 이곳을 둘러싼 유송(劉宋)과의 갈등으로 인해 3년만에 폐지되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유균인(劉鈞仁)의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진평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진평은 현 이름인데, 진(晉)나라가 설치하여 광주(廣州) 울림군에 소속시켰고, 남송(유송을 가리킴)과 남제도 그대로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광서(廣西) 경계에 있었다』

바로 여기가 백제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광서 장족자치구 창오현 일대인 것이다. 이어서 백제군에 대해서는 『백제는 지명인데, 광동 흠현 서북쪽 1백80리에 소재하였고, 터가 있는데 오문과 계림 2성의 경계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광서 장족자치구내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진평군이 설치된 지역은 북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팥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팥 문화는 한반도와 백제가 진출한 일본 열도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에서 문화의 공유를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이 지역과 인접한 운남성에서 김병호박사가 이끈 <중앙일보>탐사팀이 우리 민족 고유의 지게를 발견한 것도 우연의 일은 아니다. 탐사팀은 운남성의 첩첩산골인 호도현을 지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인 나시족 처녀들이 지게에 나무를 져 나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게는 한국민족의 독창적 발명품으로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운반도구다. 한국식과 모양 하나 다르지 않은 지게를 바로 나시족 여자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진평군에 대한 어느 기록이 맞든 간에 이들 지역이 백제군과 더불어 해변이거나 해변과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말의 대유학자인 최치원이 지은 <상대사시중장>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1백만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 했는데, 그 오월지방과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도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싸운 이유

한편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 동남아시아의 해역을 석권한 해양대국 백제는 북방 초원을 누비던 고구려와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오는 형제국이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지배세력의 언어와 풍속이 같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도 두 나라는 서로 으르렁거렸다.

역사에서는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금기시하고 있지만, 만약에 두 나라가 힘을 합했다면 한반도 신라뿐 아니라 중국대륙까지 경영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그럴 기색이 없었고 급기야 계보가 다른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가 4세기 중엽 이후부터 6세기 중반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 기원후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신라의 이름은 그대로 쓰면서 백제를 가리켜 「백잔(百殘)」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여기서 「잔」은 나쁨, 죽임, 해로움 등 온갖 악감정의 뜻이 담겨 있다. 쉽게 말해서 예전에 우리가 북한을 「북괴」로, 북한이 남한을 「괴뢰」라고 하였듯이 말이다. 여기에는 비문의 주인공인 광개토왕과 고구려 왕들의 백제에 대한 감정이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371년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백제에 의해 머리를 잘리는 비극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도학씨는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가 불구대천의 원수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두 나라의 경쟁심리가 내면에 깔려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백제와 고구려는 각각 온조(혹은 비류)와 주몽을 시조로 설정하고 있지만, 모두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갖추고 있었다. 고대에 있어서 사당은 그 친족집단의 구심점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사당은 늘 종가에서 관장하게 마련이고, 또 한 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동명묘(東明廟)가 부여 옛 땅이 아닌, 백제와 고구려의 건국지에 각각 설치되었고, 이전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때문에 고구려 왕들은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후에도 동명묘가 설치된 만주의 환인지방(고구려 건국지)까지 어려운 길을 달려가 참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백제와 고구려 왕들은 즉위할 때 이곳을 참배하는 의식을 통해 왕위에 대한 보증을 얻었던 같다. 결국 이것은 두 나라가 서로 부여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양보할 수 없는 경쟁의식을 낳았고, 급기야 무력대결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부여라는 나라는 중국 춘추시대의 주나라와 비슷한 지위에 있었다. 춘추시대의 제후들은 라이벌을 꺾고 중원을 장악한 후에 주나라 왕실의 법통을 순조롭게 계승하는 양위의 형식을 밟으려고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이족에게 있어서 정신적 의미가 강한 부여의 법통을 계승하는 문제는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이후 발해에서도 그 일단이 나타난다. 727년에 발해의 무왕이 일본에 보낸 편지에 있는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遺俗)을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가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한 발해가 그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

중국 진출 백제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적지 않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전한다.

『(백제)근구수 왕이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1차 평야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중국)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과 부씨의 진을 정벌, 지금의 요서·산동·강소·절강성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232쪽)

말하자면 백제는 중국의 해안지방만이 아니라 대륙내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강역으로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라고 평가받는 신채호가 아무런 근거없이 이와 같은 수수께끼를 남겼을까?

4세기 이후 중국 대륙은 양자강을 경계로 남조와 북조로 나뉘게 된다. 이때 백제는 남조 정권에 사신을 파견하는데, 사신에게 붙여진 관직의 이름이 매우 이상하다. 예를 들어 서하태수(산서성 분양현), 광양태수(북경 서남), 조선태수(하북성 노룡현), 광릉태수(강소성 양주시), 청하태수(하북성 청하현), 대방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하남성 비양현) 등으로 중국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도학씨는 이에 대해 『양자강 이남의 남조정권이 그 북쪽 지역 즉 당시 북위가 지배하던 각 군을 백제 사신에게 분봉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사실은 북위와 백제의 대결을 유도하려 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오래전에 이들 지역이 백제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볼 여지는 남아 있다.

두번째 수수께끼는 백제의 인구수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및 중국의 역사서는 백제의 호수(戶數)를 76만호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가 패망하고 무려 7백60여년이 지난 조선시대 초기의 호수 조사에는 옛 백제권(경기· 충청· 전라의 삼도)의 인구가 6만호 남짓에 불과하다. 이것은 백제를 한반도의 영토 안에서만 본다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세번째 수수께끼는 서울대 박창범교수(천문학)의 백제 천문현상에 대한 과학적 검정 결과이다. 박교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일식 등을 천문학적으로 재현해본 결과 천문현상이 한반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중국대륙에서 발견되는 기록임을 증명했다. 일본 천문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백제의 천문기록이 중국 것을 베낀 것이 아님도 드러났다. 이 역시 백제를 한반도에 가두어놓고 본다면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이외에도 백제에 대한 미스터리는 적잖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스터리는 결국 눈을 중국으로 돌렸을 때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는 점은 이제 명백해진 것같다.

(신동아 / 안영배 기자 1997-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