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교수 고조선 연구 "국가 기원은 고조선" 증거 제시

만주까지 영토확장 독자 청동기문명 "삼국-가야는 고대아닌 중세"

의식주-풍속 복원 한국사 재인식 계기 민족의 고향 고조선을 가다 (86년11월5~12월6일 15회)를 조선일보에 연재, 큰 관심을 모았던 윤내현교수가 연재 이후 7년동안 연구작업을 결산하는 9백 8쪽에 달하는 방대한 고조선 연구를 펴냈다. 새 연구서의 내용과 저자를 만나본다. 편집자

건국연대 올려잡아 잃어버린 역사, 고조선의 실체를 연구해온 윤내현교수(단국대)는 고조선 연구의 곳곳에서 고조선을 보는 시각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국가의 기원을 고구려 또는 신라로 보는 시각부터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흔히 남북국시대(발해와 신라시대, 일부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른다)까지를 고대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시대구분법은 바로 고조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온 오류라는 것이다. 고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고대사회의 특징은 고조선의 뒤를 이은 여러나라 시대까지로 마감되고 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는 새로운 성격의 사회가 등장하므로 사국 정립시대 부터는 중세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86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민족의 고향 고조선을 가다 에서는 고조선의 강역을 흑룡강 아래쪽까지만 잡았다. 그러나 이번의 고조선연구는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작은 정치집단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계의 통설을 반박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존의 한국사 인식을 뿌리째 뒤흔든다. 근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조선의 강역은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이었다. 서쪽으로는 북경 근처의 난하유역에 이르렀고 북쪽은 액이고납하(어르구나하), 동북쪽은 흑룡강 유역, 남쪽은 한반도 남부의 해안선에 이르렀다. 또한 윤교수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기록을 들어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2천3백~4백년으로 올려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조선 건국연대를 서기전 2천년에서 1천년으로 보고 있는 북한 학계보다 훨씬 더 위로 잡은 것이다.

온돌사용-혼인 등 서술

윤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바로 고조선시대이고, 당시 동북아시아에는 중국대륙의 황하문명권과 그에 맞먹는 세력으로 고조선문명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연구가 지닌 또다른 특징은 고조선 사람들의 의식주 문화와 풍속을 되살려냈다는 데 있다. 고조선 사람들은 목의 깃을 둥글게 만든 두루마기와 같은 겉옷을 즐겨입었고, 흰색을 좋아했다. 옷감으로는 삼베 모직 명주를 생산했고, 원시적 형태의 방직기계도 있었다. 고조선사람들은 방바닥을 굳게 다진 후 그 위에 멍석과 널판자를 깔았고, 본채와 창고를 따로 두고 살았다. 열을 보존하기 위해 화덕의 바닥에 돌이나 자갈을 깔았다. 고조선 후기에 이르면 온돌이 만들어졌다. 동성끼리 결혼하지 않았는 데 이것은 사회의 기초인 씨족공동체를 보존하고, 다른 씨족과의 혼인을 통해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여옥이 지었다는 고전시가 공후인 외에도 공후요 라는 노래도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강강수월래도 이미 고조선시대때 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말기 들어 고조선인들이 왜열도로 이주했고, 특히 북구주의 후쿠오카 지역은 당시 높은 수준의 철기문명을 누렸다. 그리고 고조선의 도읍 아사달은 바로 아침땅 이란 뜻이고, 후에 황하유역의 국가들과 교류하면서 한자로 조선이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고조선 시대에는 조선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학계서 논란일 듯 윤교수의 고조선연구에 따르면 고조선은 4차례에 걸쳐 도읍을 옮겼는데, 그 도읍의 이름들은 아사달(지금의 평안도), 평양성(요령성지역), 백악산하 사달(난하유역), 장당경(대능하 동부유역)이었다. 고조선은 계속 중국대륙 쪽으로 영토를 넓혀갔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신분제는 지배귀족 밑에 민(자유농민), 하호(종속농민), 노비 등이 있었지만, 서양의 기준에서 말하는 노예제사회는 아니었다. 국가경제의 주축은 하호들이었고, 노예의 인권도 존중됐기 때문이다. 이같은 새로운 한국고대사 해석을 담은 고조선연구는 그 일부 내용이 학계에서 발표가 되면서 논란을 일으켰고, 이제 그 두꺼운 부피만큼 묵직한 논쟁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박해현 기자

저자 윤내현교수 "고조선 실생활서 홍익인간 실천"

지배층 수확량 5%만 세금으로 거둬 "고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원형이고, 남북한 통일을 내다보는 오늘의 시점에서 더욱 더 그 의미가 깊은 우리의 역사입니다." 조선일보 연재 후 7년만에 고조선 연구를 내놓은 윤내현 교수는 그동안 고조선에 대한 학술적 작업들이 강역, 건국 연대 기점 등에 매여있었던 탓에 고조선의 실체를 생생하게 되살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우선 홍익인간 이란 고조선의 사상만 해도 추상적으로 알려져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고조선 사회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홍익인간의 사상이 실생활에서 실천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윤교수는 고조선 당시 중국의 국가들과 비교해볼 때 세금이 적었다면서 이런 해석을 했다. "주나라는 농민들로 부터 수확의 10분의 8까지 세금으로 거둬들인 데 비해 고조선의 지배집단은 불과 수확량의 20분의 1만 받았습니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윤교수는 중국의 시경 을 비롯, 사기 후한서 삼국지의 동이전 등 중국의 고문헌 기록과 만주와 북한일대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 등을 토대로 고조선의 물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미 고조선 시대에 한민족 고유의 난방양식인 온돌 이 있었다"면서 "출토된 유물에서 시루 가 나온 것을 보면 떡을 그때부터 먹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고조선의 유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그릇들이 나오는 것은 그 만큼 다양한 음식문화를 가졌다는 것이고, 이미 그때부터 오곡을 먹었고, 소금을 조미료로 사용했다는 것도 확인된다.

원래 중국 상주사를 전공했던 윤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중국의 고문헌에 들어있는 고조선 기록을 본 뒤 큰 충격을 받아 80년대부터 고조선 되찾기 운동을 펼쳐왔다.

(조선일보 1994-11-26)